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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가 있는 수원화성 성안마을
'2016 수원화성방문의 해' 수원 곳곳 돌아보기
2016-03-08 15:42:19최종 업데이트 : 2016-03-08 15:42:19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수원으로 행정 중심지가 옮겨지기 전까지만 해도 본디 행정의 중심지는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의 융· 건릉 자리였다. 그렇지만 1789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을 결심하면서 새로운 시가지를 물색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을 품고 있는 도시 수원(水原)은 그렇게 탄생됐다.

서울과 수원을 잇는 대로는 곧 제주까지 가는 직로로서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발돋움했다. 정조의 정치적 기반을 전제한 배후도시 수원에 조선후기 최대의 신도시 화성(華城)이 건설됨으로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드높아졌다. 정조는 화성건설을 통해 백성들이 모두 부유해지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동시에 자주적인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도시가 되기를 바랐고 이곳에서 개혁의 꿈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격변하는 19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가깝게는 한국전쟁과 36년간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시절, 더 나아가 정조 사후 겪어야 했던 천주교 박해 등 아픔의 역사가 이곳 화성에 오롯이 새겨졌다. 

천주교 성지가 있는 수원화성 성안마을 _1
지동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감옥터를 찾아보자. 작은 사진은 화성축성 당시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림(수원시 '수원시 도시계획200년사')을 보면 팔달문과 수원천 사이에 둥근 모형의 감옥터가 보인다

성안에 남아있는 역사와 사라진 장소를 찾아 떠난다. 먼저 화성성곽 사대문 중 팔달문에서 지동시장으로 향한다. 팔달문안내소로 가기 전 왼쪽 두 번째 골목에서 약간만 들어가면 화성 축성 당시 있었던 감옥터(일명 아구탕 골목)다. 남수문을 거쳐 동남각루로 향한다. 천주교인들 박해지로 이아, 종로사거리, 행궁, 남암문, 동장대 등과 함께 이곳 동남각루에서도 순교자들의 목을 쳤다. 아래에서 각루 위를 쳐다본다.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 온몸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다.
참수형을 한 뒤 목없는 몸을 성 밖으로 내던진 곳 동남각루와 지금은 사라졌지만 참수된 교인들의 목을 매달아 두었던 남암문(시구문)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잠시 묵념한다. 

이어 종로 북수동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난 2000년 성지(聖地)로 선포됐다. 수원화성 안에서 처형된 조선후기 순교자 2천 여 명을 현양하기 위해서였다. 성당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목을 조이는 돌형구에서 엿볼 수 있듯 처형된 교인들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가족들의 소리없는 울부짖음이 들리는듯하다. 그들의 거룩한 순교를 기리는 '십자가의 길-14처 기도'장소와 '로사리오의 길'도 조성됐다. 

천주교 성지가 있는 수원화성 성안마을 _2
수원시내 모든 성당의 모태가 된 북수동성당 정문

1801년 신유박해부터 전국적인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면서 한강 이남을 비롯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은 관할처인 수원유수부 화성으로 압송됐다. 순교터가 성곽 곳곳에 꽤 많이 남아있는 이유다. 천주교 간판을 정식으로 내건 1890년대 이후에도 수원면에서 유일한 성당이었던 이곳을 나오며 두손을 모은다.

양반교인들을 심문했다는 화성행궁을 지나고,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곳 관아인 이아터로 향한다. 구한말까지 수원법원과 검찰청자리였지만 지금 이곳은 예수그리스도교 후기 성도교회가 자리해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중인 이하 일반인들과 천민들을 심문했던 곳으로 슬픔이 잔존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밖에도 사형터로 알려진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지금 종로교회 사거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영(토포청)에서도 교수형이 집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천주교 성지가 있는 수원화성 성안마을 _3
이아터가 행궁동 생태마을 안에 자리해 있다
천주교 성지가 있는 수원화성 성안마을 _4
방화수류정 측면 벽, 기하학적 문향이 사철 아름답게 빛난다

마지막 코스로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으로 간다.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방화수류정에서 마침표를 찍는 이유가 따로 있다. 종교적 시대적 아픔을 찾아 수원화성을 방문하는 천주교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정약용과 방화수류정의 십자문양' 때문이다. 정약용의 '다산문선(솔. 1997)'에서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지만 그는 폐족의 처지에서 절절한 마음을 그대로 써내려갔다.

수원화성 설계는 다산 선생이 관여했다. 그러나 방화수류정 등 화성건설 당시 진두지휘하지는 않았다. 스물여덟 살 때(1789)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내직을 거쳐 예문관 검열에 오르지만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탄핵받아 해미현으로 유배된다. 바로 풀려나지만 이후 4~5년 동안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고 서른 네 살이던 1795년 우부승지에 오르지만 청나라 신부 주문모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된다. 지우(知遇)처럼 아꼈던 정조의 사랑으로 1799년 형조참의 등을 지내지만 1800년 임금이 승하하자 노론 벽파에 의해 기나긴 유배 길에 오른다. 

따라서 방화수류정 벽면+무늬와 내부 목재부분에 나타난 십자문양은 천주교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벽돌장이 천주교 신자일 수도 있겠다.

어찌됐거나 방화수류정은 천주교 박해 이후에도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로 들고 일어난 동학혁명군의 자취와 더불어 삼일 독립운동의 들불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이 모두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에서 일어난 그날의 함성이거늘,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갖는 교인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는가. 
유럽의 유산은 대부분 종교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니 220년 전 축성된 수원화성 안에서 꽃피운 천주교 성지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보자. 2016 수원화성방문의 해를 맞아 전국에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방문하면 좋겠다.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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