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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천변에 근대역사유적지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수원 곳곳 돌아보기
2016-05-09 16:07:27최종 업데이트 : 2016-05-09 16:07:27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아주 오래전부터 광교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생태하천 수원천의 첫 관문 북수문에 당도한 후 남수문을 거쳐 황구지천을 지나 서해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수원천은 수원사람들의 삶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물길이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레 흐르듯 수원화성의 정조대 역사뿐만 아니라 굴곡진 근현대사까지도 묵묵히 지켜봤다.

1922년 대홍수로 떠내려갔던 북수문은 수원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운동으로 1932년도에 다시 그 자리에 서고, 1927년 유실되어 흔적을 잃었던 남수문은 2012년이 되어서야 복원됐다. 
지금도 여전히 수원천은 수원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미래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수원권역사가 여기, 수원천변에 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말고도 내 고장 수원근현대사가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수원천은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봄으로써 수원의 정체성을 느낄 수있는 여행지다. 중· 고교 시절 역사시간에 시대구분으로 '근대'라 칭하던 시기, 수원은 경부선 수원역(1903)의 완공이후 시세발전이 본격화됐다. 행정과 문화, 경제의 중심이던 성안을 기점으로 근대 건축물도 하나 둘 들어섰다.

수원천변에 근대역사유적지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_1
수원천변에 근대역사유적지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_1

근대의 기억을 되살리는 문화유적지를 찾아 먼저 남수문으로 간다. 정조의 개혁정신의 발로로 축성된 수원화성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를 따라 시야를 멀리 북으로 향한다. 물고을 수원의 젖줄 사이로 여름으로 향하는 연초록의 수초들이 천변을 가득 덮어버렸다. 자연친화적 하천으로 다시 살아난 덕분이겠다. 오리가족이며 백로까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늦봄의 정취를 더하는 오후다. 

삼진화점, 서문기름집, 새우젓· 얼음, 포차, 동화철공소, 흥원솜틀집, 강원도쌀보리....대형마트가 아닌 오래전 장터에서나 만날 법한 추억의 상점들을 따라 가다보면 '수원사 불교포교당'이다. 1920년 용주사 주지였던 강대련이 도심 포교를 목적으로 성안에 법당을 열었다. 극락대원전이 당시의 역사를 오롯이 보여준다. 비록 강대련은 친일파로서 역사에 기록됐지만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앞마당에 걸린 형형색색 연등(燃燈)은 부처님의 가피일 진저, 평화롭기 그지없다. 잠시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 후 매향교로 간다.

참된 정치로 복된 수원화성이 되기를 바라며 선정을 베푼 조선후기 수령들 서유린, 박주수, 박기수, 정원용, 김병기, 김병교, 서유구, 이학수 등 중동사거리를 비롯해 수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10여명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진정 현대에도 후대에까지 이름을 알리는 정치가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며 그들의 공덕을 칭송한다.

박물관 쪽 천변과 담벼락을 따라가다 드디어 수원100년의 역사와 조우한다. 수원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의 족적이 역력한 삼일중학교다. 선생은 삼일학교의 설립자 중 1인으로 교장으로 활동한 근대 교육자다.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일제 강점 후 1912년에 만주로 건너갔다. 신흥무관학교의 또 다른 이름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민단 결사대 대원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위대한 인물이다. 오래전 필동의 무덤도 이곳 학교 안에 있었다.

수원과 만주에서 온가족이 함께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필동 선생을 떠올린다. 필동 선생의 아들은 군자금을 갖고 만주로 돌아오다가 혹독한 추위에 동사했다. 선생도 1920년 일본 당국에 체포되어 반신불수가 되어서 수원으로 돌아와 1923년 다시 삼일학교를 맡아 운영하면서 기금을 모아 '아담스 기념관'을 짓는다. 
우진각 지붕의 2층 벽돌 양옥 건물로 지하1층까지 갖춘 전형적인 근대 건축물이다. 정문에서 학교를 지키는 임무를 2년째하고 있다는 아저씨, 그는 오자마자 학교의 역사를 배웠는지 울분 찬 목소리로 기념관의 이력을 알린다. 그의 목소리는 1930년 56세로 순국한 선생의 얼이 되어 햇살을 따라 퍼지는 듯하다.
 "저 건물이 100년이나 되었어요. 그런데 정부는 그 만큼의 위상을 쳐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집중관리가 필요해요."

근대교육기관의 산실 '매향학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이 바로 이웃해 있다. 기독교 신앙이 전래되면서 1902년 설립됐다. 나혜석이 1910년 매향여학교를 졸업했다. 비록 처음의 위치(1913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는 아니지만 근대교육 수혜를 입은 덕분에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독립운동가로, 서양화가이자 문인으로서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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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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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올라가면 수원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동신교회가 아주 작지만 단단한 위세로 서있다. 오른편 작은 능선에 '노리마츠 마사야스'란 이름의 일본인 선교사 비가 서있다. 수원에 영주한 최초의 일본인이었지만 여타의 일본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한국을 사랑해 한국식으로 생활했고 결국 죽어서 광교산에 뼈를 묻었다. 애초 선교로 수원에 입성했지만 수원사람들 속에 영원히 남기를 바랐다. 안타깝게도 철문이 걸려 있어 가까이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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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신교회와 노리마츠비

수원시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도 들러볼 일이다. 2004년 경기도지정무형문화제 8호인 승무와 살풀이 춤 등 전통 무형문화재 보존과 발전을 위한 공연 및 전시장이 그 안에 있다. 잠시 쉼을 청하듯 들른 후 화홍문이라고도 불리는 북수문으로 간다. 
얼마 전 화성성역의궤에 따른 복원을 마치고 새로운 얼굴로 맞아준다. 품격 있게 격식을 갖추고 관람객을 맞지만 이젠 마루에 앉아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수원천과 주변 풍경 관망은 할 수 없다. 열쇠로 양쪽 문을 다 걸어놨기 때문이다.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는 잃기 마련인가 보다. 아쉬운 마음은 방화수류정에서 풀어 놓는다. 

방화수류정이란 이름도 갖고 있는 동북각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초월해 200여년전의 수원화성에 앉아 있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저 아래 남서쪽 성안으로 시선을 준다. 북수동성당 뒷쪽이다. 성 밖 영동시장과 지동시장과 함께 성안 우시장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면서 남수동에 있던 기생조합도 그려본다. 
의기(義妓) 김향화와 경기도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이선경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때마침 화성열차가 천변을 따라 관광객을 가득 싣고 달린다.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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