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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
형제봉에서 토끼재 길에 그들을 뒤쫓아 갔다
2015-10-01 06:04:46최종 업데이트 : 2015-10-01 06:04:46 작성자 : 시민기자   이대규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그날은 형제봉을 내려와 토끼재로 하산하며 광교산 초가을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쪽으로는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나무 숲속사이로 간간이 얼비쳐오는 파란포장 빛이 눈길을 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드러내지 않은 채 감질나게 한다고 할까. 

혹시 '서봉사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온 것이다. 그때 양지재에서 넘어간다는 어느 문헌이 떠올랐다. 그래서 기세 좋게 그곳 분묘사이로 보이는 작은 길 하나를 따라 들어간다. 그러나 숲속에서 사라지고 없다. 평평한 그곳은 아는 사람들만 들어오는 은밀한 장소였고, 주변에는 담배꽁초와 화장지 등으로 어지러웠다.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토끼재로 향했다. 그곳에도 가는 길이 있으니 누군가와 동행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낮선 곳에 멧돼지라도 만나면 맨손으로 당할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벌써 몇 년 전 백년수 약수터 위에서 황소만한 어미와 새끼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동행하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토끼재에 이르자 마주오던 그들 남자 셋, 방향을 바꿔 수지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아! 이런 것을 두고 법정스님은 시순 인연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놓칠세라 그들을 뒤쫓아 내려간다. 길도 환히 나있다. 그러나 워낙 경사가 심한 터라 앞 사람 하나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조심조심 거리를 두고 따라 내려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골짜기는 점점 더 어둡고 깊어지며 생각보다 멀다. 파란 포장이 처져 있을 것만 같은 그곳은 어디인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올라올 때는 다른 길로 왔다며 초행이라 했고, 혼자서 골짜기 능선을 찾아 둘러보지만 허사다. 

더 내려갈 수밖에 없는 길, 다시 토끼재를 거슬러 올라 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길을 따라 얼마를 내려가니 부부인 듯 두 남녀가 도토리를 줍고 있다. 반가움에 수지 쪽에서 올라왔느냐 물으니 그렇단다. 파란 포장이 쳐진 곳을 혹시 보지 않았냐고 묻자 저 아래라는 것이다.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 이러할까! 얼마를 더 내려가자 넓은 골짜기 안에 모습을 드러낸 파란포장 언덕의 공사현장, 정확히 말하면 서봉사지 발굴조사현장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1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1

광교산 서봉사지는 보물 제9호로 현오국사탑비가 있다. 국사(國師)는 왕이 임명하는 것으로 고승들 중에 자문을 얻어 간택하면 고승은 세 번까지 사양하는 예를 표하고, 왕은 곧 국사를 정하여 합당한 대우와 물품을 보내 개경으로 모시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때 고승은 하사 받은 가사와 장신구를 갖추고 하산했으며, 통과하는 고을에서는 성인을 맞이하는 의식을 구경하기 위해 인파가 길을 메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승은 개경에 있는 대찰에 머무르고, 왕은 이때 고승에게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니 국사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발굴 현장은 3차 조사를 끝내고 내년 2016년에 제4차 조사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그동안 5,6단의 기단지에서 고려시대의 건물지군과 서봉사의 강당지와 중심 구역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또한 출도 된 유물로는 고려시대의 명문기와와 어골문, 어골복합문 평기와가 주로 나왔으며, 5단 건물지에서는 당시 서봉사의 생활 규모를 엿볼 수 있는 대형 맷돌이 나왔다는 것이다.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2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2

현오국사탑비는 사진처럼 비각에 잘 모셔져있다. 그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새긴 것이라며, 높이188cm너비97cm인 점판암의 비석은 화강암의 받침위에 놓여있다. 13세 때 출가하여 인종19년 '불일사'에서 계를 받았으며, 귀신사, 국태사, 부석사 등의 주지를 역임하고 승통이 되었다고 한다. 명종 원년 왕에게 승려의 가사를 하사 받았고, 그 후 명종8년 53세로 입적하자 왕은 크게 슬퍼하여 국사를 추종하고 '현오'라는 시호를 내린 뒤 동림산 기슭에 화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현장주변은 출입금지선이 쳐져있고, 입구에서 비각까지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지단을 오르는 석축계단에는 시멘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 같지 않아보였으며, 관계자에게 전화통화를 해보았다. 왜정시대까지는 탑비만 전해오던 것을 박정희정부 들어 비각을 짓고 현재까지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3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3

발굴현장과 상관없이 비각을 찾는 탐방객들은 통로를 이용하여 올라가 살펴볼 수가 있다. 지단 상단에는 향나무 한그루가 하늘로 곧게 서 있고, 비각 마당에는 느티나무도 옛날만 같이 지키고 있다. 주변 수로는 석축을 하여 정리가 되어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서봉사의 복원도 이뤄질 것 같아 물어보았다. 그러나 관계자의 말은 내년도 2016년의 제4차 발굴조사가 끝나면 정리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되겠지만 복원까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부도의 흔적은 없고, 현오국사탑비만 있는 것을 두고 서봉사지로 단정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보았다. 문득 고개 하나 너머로 진각국사탑비가 생각난 것이다. 그러나 관계자는 발굴한 기와에서 서봉사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4
파란 포장언덕, 그곳이 '현오국사탑비'있는 서봉사지였다_4

이곳 현오국사탑비가 있는 마당에서 바라본 형제봉의 모습이다. 명당으로 치자면 누워있는 안산으로 영락없이 출산을 앞둔 임부의 모습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겠는가, 억조창생(億兆蒼生)의 탄생과 생산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 산에서 광채가 솟는 것을 보았으며, 부처님이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의 광교산인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광교산은 1왕사 2국사가 나온 명산이다. 창성사지와 서봉사지를 비롯하여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느껴보면 종루봉을 넘어 창성사지와는 동서로 그 맥이 전해온다. 명산에서 내뿜는 정기 같은 것 말이다. 여기 와서 형제봉을 바라보니 그 모습 명산이라는 것 이제야 알 것 같다. 저 태동의 힘찬 소리가 들릴 것 같지 않은가. 전율하는 기분으로 초행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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