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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
2017-03-16 18:11:00최종 업데이트 : 2017-03-16 18:11:00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인터넷 활용능력이란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검색했을 때 나온 검색결과가 얼마나 정확한지 판별하는 능력이다. 인터넷에는 불특정 다수가 올린 온갖 정보들이 넘쳐나는데 정확한 정보도 있지만 그릇된 정보, 악의적으로 조작한  정보 등이 많기 때문에 원하는 정보인지를 판단하려면 그만큼 배경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김준용 장군 전승지'라고 검색했을 때 검색결과는 지식백과, 블로그, 뉴스, 웹문서, 카페 순으로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지식백과와 뉴스 기사를 신뢰하게 마련이다. 블로그나 카페의 글은 오류가 있어도 걸러내지 못하고 확대 재생산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얻는데 시간이 걸린다. 

'김준룡 장군 전승지'에 대한 검색결과를 분석해보면 지식백과, 뉴스 기사, 전문가 기고 글 등에서 모두 오류가 보이는데 이는 현장에 가보지 않아 비문의 글자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남의 글을 베끼거나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며, 이런 글을 참조한 블로그 기사나 카페 기사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
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 입구

2010년 '오랑캐들이 항복한 곳 이란 의미의 호항골,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 수원일보 기사에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 따르면 그 후에 화성을 축성할 때 성역(城役)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병자호란 당시 김준룡 장군의 전공을 전해들은 성역총리대신 좌의정 채제공(城役總理大臣 左議政 蔡濟恭)이 청군이 항복했다는 호항곡의 꼭대기 자연 암벽에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 金俊龍將軍 戰勝地)」라 새겼으며 그 글씨 좌우에 「병자청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음각한 비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2013년 전문가 기고 글을 보면, '글씨는 암벽을 갈아 비액을 만들고 세로로 '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큰 글씨고 새겼고, 그 좌우에 조금 작은 글씨로 '丙子淸亂公提湖南兵'과 '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써 놓은 것이다. 이는 '충양공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라는 것과 함께 '병자호란 때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청나라 3명의 대장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1977년 3월 17일 동아일보 '340여 년 만에 발견된 김준룡장군의 전승비(金俊龍將軍 戰勝碑) 호란(胡亂)때 양고이부수(揚古利部隧) 섬멸 실증'기사에서, '수원시 하광교동 광교산에서 병자호란 때 적장 양길리(揚吉利) 부대를 섬멸한 충양공(忠襄公) 김준용(金俊龍)장군의 전승지비문이 3백40여 년 만에 수원시 문화재 조사반에 의해 발견돼 속칭 호항곡(胡降谷) 골짜기가 격전지였음을 실증했다. 호남병마절도사로 있던 김장군은 당시 의병을 모집, 남한산성에 주둔한 청태종(淸太宗)의 사위인 양고리(揚古利) 부대를 광교산으로 유인해 격전을 벌여 양고리(揚古利)등 적장 3명을 격살한 뒤 자신도 전사했었다는 것.'

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_2
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 설명간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김준룡 장군 전승지 및 비(金俊龍將軍戰勝地─碑)'에서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수원 광교산 중턱 해발 400m쯤 되는 곳의 자연 암벽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김준룡전승지)'라고 새기고 좌우에 '丙子胡亂公提湖南兵覲王至此殺淸三大將(병자호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이라고 새긴 전승비가 있다. 규모는 세로 135㎝, 가로 40㎝이다. 전하는 말로는 수원성을 쌓을 때 석재(石材)를 구하러 갔던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축성 책임자 채제공(蔡濟恭)이 이 사실을 새기게 하도록 하였다 한다."

두산백과에 '김준룡 장군 전승지 및 비(金俊龍將軍戰勝地─碑)'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13일 만에 수원 광교산에 이르러 청군(淸軍)과 싸워 청 태종의 부마 양고리를 비롯한 청의 장군 2명을 죽이고 수많은 적병들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94년(정조 18), 수원성(水原城) 축성을 관리하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이러한 사실을 그곳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고 김준용이 대승을 거둔 이 광교산의 천연 벽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

문화재청에 '김준룡 장군 전승지 및 비(金俊龍將軍戰勝地 및 碑)'에서 '그곳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청 태조(누르하치)의 사위이며 적장수인 양고리 등을 처단했다. 이에 조선군은 사기가 크게 높아져 청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숙 이라는 시호도 붙여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여 정조 때 화성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간 사람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축성책임자 채제공이 그 사실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암반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새기고, 그 좌우에 작은 글씨로 '丙子淸乱公提湖南兵,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전승의 내용을 새겨 놓았다.'

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_3
광교산 광교암, 김준룡장군 전승비

1974년 11월 2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주봉이 해발 5백82미터나 되는 이산의 창성사(彰聖寺) 절터에는 탑이 하나 서있으니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청군(淸軍)을 크게 섬멸했다는 전승탑으로 그 이름은 의성탑(義聖塔)이다. 즉 이조 16대 인조 17년(136) 청태조가 이끄는 20만 대병이 서울을 짓밟고 남한산성으로 피몽한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할 때 당시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있던 김준용은 근왕병을 이끌고 이산에 이르러 청병과 일대혈전을 벌여 호장(胡將) 세 명의 목을 자르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 후 이산에 탑을 세웠으며 큰 바위에 '김준용전승야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金俊龍戰勝也提胡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새기고 이곳을 의성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광교산에 있는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설명 간판에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성축성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준룡장군 전승 사실을 새기라고 했다고 한다. 암반에는 세로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큰 글씨로 새겼고, 그 좌우에 조금 작은 글씨로 '병자청란공제호남병(丙子淸亂公提湖南兵)'과 '근왕지차살청삼대장(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써 놓았다. 이는 '충양공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라는 것과 함께 '병자호란 때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청나라 3명의 대장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수원박물관에는 '김준룡 장군과 광교산전투' 코너에 비 모형을 만들어놓고 설명글에는 '중앙에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 좌우에는 병자호란공제호남병 근왕지차살청삼대장(丙子胡亂公提湖南兵 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 새겨져 있다.'

광교산 종루봉 바로 아래 있는 '김준룡 장군 전승지와 전승비' 유적지를 답사했다. 반딧불이 화장실 옆 등산로로 올라 백년수 정상, 형제봉, 양지재를 지나 종루봉 가기 전에 등산로 좌측에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간판이 서있다. 안내 표지를 따라 약 70여 미터 내려가면 큰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유적지가 있다. 현장의 비를 조사하고, 비에 새겨진 글자와 각종 기사를 비교해 정리했다. 위에 나열한 9개 기사를 검토해보면 정확한 기사는 한건도 없는 엉터리 기사이고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한데 한자를 제각각 써놓고 제각각 해석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확한 비문은 중앙에 큰 글씨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 우측에는 작은 글씨로 '병자청란공제호남병(丙子淸乨公提湖南兵)', 좌측에는 '근왕지차살청삼대장(覲王至此殺淸三大將)'로 써있다. 직접 답사해서 비를 보지 않고 남의 글을 베껴서 썼기 때문에 같은 한자를 틀리게 쓴 것으로 보인다. 

광교산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전승비_4
수원박물관, 김준룡장군 전승비 모형

원래 비문의 '병자청란(丙子淸乨)'을 '병자호란(丙子胡亂)', '병자청란(丙子淸亂)', '병자청란丙子淸乱)' 등으로 쓰고 있다. 비에는 란(乨)이라 썼는데 란(亂)의 이체자이며, 란(乱)은 란(亂)의 간체자이며 일본식 한자이다. 근왕(覲王)이란 글씨도 근왕(勤王)이라 쓴 경우가 많은데 해석 자체가 틀려지는 것이다.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는 얘기가 아니고, 호남병을 이끌고 왕을 뵈러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김준룡 전승지 비'와 관련한 문헌기록은 있을까. 1899년 편찬된 '수원군읍지' '고적(古蹟)' 편 '광교암(光敎巖)' 설명에 승전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김준룡솔병근왕지광교산(金俊龍率兵勤王至光敎山)'이란 기록이 보이지만 비문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72년 '수원부 지도'에는 '김준룡솔병근왕지차(金俊龍率兵覲王至此)'란 기록이 보인다. 수원군읍지에는 '근왕(勤王)'이라 썼고, 수원부 지도에는 '근왕(覲王)'이라 썼다.

'채제공' 관련 문헌기록은 있을까.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정조실록을 보면 1792년(정조 16) 9월 29일 김준룡(金俊龍)에게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는 채제공이 좌의정에 있을 때였다. 당연히 채제공이 김준룡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화성축성 기간에 비문을 새겼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비문 글씨에 대해 금석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첫째, 잘 쓴 글씨는 아니지만 현대의 글씨는 아니다. 아무리 바위에 새겼다고는 하지만 글자의 짜임새와 결구가 엉성해 전문가의 글씨는 아니다. 
둘째, '충양공김준룡전승지'가 근대적 어순이기도 하지만 당대에도 이런 표현은 자주 사용했음을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셋째, '병자청란(丙子淸亂)'이란 표현에 대해서이다. '고전번역원'에서 '병자호란'을 검색하면 1800건, '병자청란'을 검색하면 3건, '병자노란'을 검색하면 107건이 검색되는데, '병자청란'이 현대적인 표현 같지만 당대의 지식인들도 사용한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에 대해 정밀한 현장답사와 문헌적인 고증 없이 함부로 글을 쓰면 위와 같이 오류로 가득한 엉터리 글이 된다. 남의 글을 베끼면 전문가도 일반인도 오류의 함정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광교산에 있는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설명 내용을 정확히 고치기 바라고, 수원박물관에 있는 설명 내용도 정확히 고쳐야 한다.

광교산에 갈 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이곳에도 들러 역사가 주는 교훈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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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광교암, 김준룡장군 전승지, 수원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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