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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돌 뜨던 터(부석소)를 찾아서
2017-02-08 15:45:51최종 업데이트 : 2017-02-08 15:45:51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여행에 있어 수원화성 답사와 화성행궁 관람은 필수 코스이다. 수원화성을 일주 하면서 팔달산에 올라서는 화성장대에서 수원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서남암문 밖 용도를 걸으면서 소나무 숲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다. 팔달산 솔 숲 사이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이 왜 수원8경인 팔달제경(八達霽景)으로 불리는지 수긍이 간다. 

평지에 곡선으로 쌓은 성벽을 보면서 벽체의 안정감을 읽을 수 있고 공심돈을 통해서는 전투시설임에도 탁월한 미적 건축미를 발견할 수 있다. 화홍문 홍예를 통해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보라를 상상할 수 있고, 용연에 아른거리는 방화수류정의 잔영을 보면서 맑게 떠오른 달을 볼 수도 있다.

수원화성 돌 뜨던 터(부석소)를 찾아서_1
숙지산 돌 뜨던 터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답사한 이후에는 어디를 여행해야 수원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을까. 정조대왕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효행길이 있고, 농업생산의 혁명을 이룬 만석거와 대유평, 축만제와 서둔이 있다. 또한 수원화성 축성 때 돌을 뜨던 터가 있는데 현재는 소외된 유적지 이지만 수원화성과 관련된 중요한 답사지 이다.

화성성역의궤 첫 번째 장인 시일 '가려 뽑은 날짜' 첫째 줄에 갑인년(1794) '정월 초 7일 묘시에 석재 뜨는 공사를 시작하고 25일 묘시에 성터를 닦다.' 화성을 축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석재였음을 알 수 있다. 수원화성 축성에 필요한 돌 뜨던 터는 숙지산, 여기산, 권동, 팔달산이었다.

수원화성 돌 뜨던 터(부석소)를 찾아서_2
숙지산 돌 뜨던 터

'화성부의 서쪽 5리 쯤 되는 공석면(空石面)에 숙지산이 있고, 또 그 서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여기산이 있다. 처음에는 흙에 덮여있어 한 주먹의 돌이 있는지도 몰랐으나 석맥을 찾아 들어가자 그 파는 대로 이리 저리 걸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후 권동에서도 석맥을 찾았는데 두 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또 서성의 터를 닦던 날 팔달산 왼쪽 등성이에서부터 용도에 이르기까지 6백~7백보가 모두 석맥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성의 한 쪽 면은 제자리에서 캔 돌을 사용하였다.'고 화성성역의궤는 기록하고 있다.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았으나 결이 조금 더 가늘었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칠었다. 숙지산에서 8만 1천 100여 덩어리, 여기산에서 6만 2천 400여 덩어리, 권동에서 3만 200여 덩어리, 팔달산에서 1만 3천 900여 덩어리의 돌을 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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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지공원에 있는 숙지산 돌 뜨던 터 표석

돌을 캐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돌을 화성 축성 현장까지 운반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돌을 캐는 동시에 돌을 운반하기위해 도로를 정비했다. 선단석, 홍예석, 청판, 장대석, 원주 등 돌 중에서도 가장 큰 돌과 큰 아름드리 재목 등을 대거(大車)라는 수레 8대가 운반했는데 소 40마리가 끌었다. 선단석은 4대문 홍예 아래에 있는 아주 큰 돌이다. 숙지산 채석장에서 거중기로 선단석을 들어 올리면 대거가 거중기 밑에서 돌을 싣고 화성 축성 현장으로 옮기고 녹로를 이용해 홍예 아래에 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성 축성시 가장 많은 돌을 조달한 숙지산에는 돌 뜨던 터가 여러 곳 남아있다. 화서다산도서관 뒤쪽 작은 언덕으로 넘어가면 우측에 아주 큰 채석장이 나온다. 아마 이곳에서 가장 많은 돌을 캤을 것으로 보이는데 운반하기에도 편리했을 것이다. 숙지공원 입구에서 야산으로 올라가면 군데군데 돌 뜨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유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곳은 한곳도 없다. 

수원화성 돌 뜨던 터(부석소)를 찾아서_4
화서다산도선관 뒤 돌 뜨던 터 가는 길

접근이 편리한 돌 뜨던 터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염없이 땅만 파는 것 보다는 확실한 유적을 개발하고 거중기, 대거, 평거, 동차, 유형거, 녹로 등 화성 축성에 사용했던 기기를 활용하면 현장감 있는 역사유적지가 될 것이다. 근거가 확실한 역사 콘텐츠인 만큼 돌 뜨던 터가 복원되면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높고 관광 인프라 측면에서도 강력한 스토리가 되리라 본다. 

정조대왕은 "땅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熟知)라 했으니, 이른바 예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 일컬어졌는데 오늘날 갑자기 셀 수 없이 단단한 돌을 내어 성 쌓는 용도로 됨으로써 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숙지산 돌 뜨던 터에 남아있는 정조대왕의 말이다.

숙지산 품에 안긴 숙지공원의 화서다산도서관에서 출발해 오솔길을 따라 숙지산에 산재해 있는 돌 뜨던 터를 찾아가 보자. 유적 답사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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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여행, 수원화성 돌 뜨던 터, 숙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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