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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관문 효행길을 걷자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수원 곳곳 돌아보기
2016-10-01 12:23:22최종 업데이트 : 2016-10-01 12:23:22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은 사방으로 통해있고 팔방으로 도달한다고 해서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 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수원의 관문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첫 번째 길목인 지지대고개이다. 정조 대왕 당시에도 지지대고개를 기준으로 북쪽은 광주 남쪽은 수원 이었다.

정조 대왕은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고 1800년까지 현륭원을 참배하기위해 13차례나 수원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지지대고개를 넘어오고 넘어갔다. 지지대고개는 원래 사근현(沙斤峴) 이었는데 정조 대왕에 의해 1795년에 미륵현(彌勒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796년에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 지지현으로 고친 후 이곳에 지지현이란 표석과 장승을 세웠는데 이 표석과 장승이 수원의 관문이자 현륭원 원행길의 첫 번째 이정표였던 것이다.

수원의 관문 효행길을 걷자_1
지지대고개

 "매번 현륭원을 참배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당도할 때면 고삐를 멈추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채 나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하였다. 이번 행차에서 미륵현의 윗쪽에 앉은 자리를 빙 둘러 대(臺)처럼 되어 있는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이 뒤로는 행행(幸行)하는 노정(路程)에 미륵현 아래에다 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첨가해 넣도록 할 일을 본부(本府)와 정리소(整理所)에서 잘 알아서 하도록 하라." 7박 8일간 원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 1795년(정조 19) 윤2월 16일자 정조실록 기록이다.

현재 지지대고개에 가보면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맞은편에 1807년에 세워진 지지대비와 하마비, 지지대비 오르는 계단에 지지대 주필대만 남아있고 지지현, 지지대 표석과 장승은 없어진지 오래다. 원래는 지지대고개가 높았었지만 1974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고개를 약 5미터 가량 깎아 현재와 같이 되어 지지대비가 계단위에 남게 된 것이다.

수원8색 길 중에서 효행길은 정조 대왕이 지지대고개부터 현륭원을 참배할 때 왕래하던 길인데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느끼며 걷을 수 있는 스토리가 있는 길이다. 효행길은 지지대고개부터 수원시 경계까지 약 12.3km이며 소요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효행길이 중간에 끊어져 아름다운 효행도 끊긴 것 같아 안타깝다. 역사 문화적으로 한 뿌리임을 인식해 화성시와의 협력으로 효행길이 현륭원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 서울시, 안양시, 의왕시와의 협력으로 창덕궁부터 수원까지의 정조 대왕 능행차를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을 모범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수원의 관문 효행길을 걷자_2
노송지대

효행길의 시작은 지지대비 맞은편 효행공원에서 시작된다. 광교산 등산로 입구 옆으로 이어진 길이 원래 정조 대왕이 행차하던 길이다. 등산로 바로 옆에 정조 대왕 당시에 심은 노송(老松) 한그루가 있는데 1973년부터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정조 당시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고 했지만 이렇게 보호받는 노송이 총 34그루만 남아있다. 

효행길을 계속 걸으면 정조 대왕 동상이 나오고 그 주변에도 노송 몇 그루가 생존하고 있다. 이 길가에는 키가 크고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데 한적한 옛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괴목정교를 지나 1번 국도를 가로지르면 노송지대 이다. 노송 19그루가 생존하고 있는 길인데 최근에 노송 보호를 위해 도로를 폐쇄하고 우회도로를 개설했다. 제대로 된 정책 덕분에 효행길 다운 운치와 고즈넉함이 있는 길이 되었다. 길 좌우에 있는 노송과 새로 심은 소나무 덕분에 솔향기 맡으며 연인과 걸으면 사랑이 무럭무럭.

수원의 관문 효행길을 걷자_3
만석거

잠시 도시의 포도를 걸어야 만석거에 당도할 수 있다. 만석거는 1795년 봄에 축조했는데 그해 만석거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은 대유평에서 풍작을 거두게 되었다. 수원에서 시작된 농업혁명의 중심에 바로 만석거가 있었던 것이다. 만석거를 축조한 그해에 가뭄을 극복하고 풍작을 거두자 1796년 1월 원행길에 정조 대왕은 저수지 이름을 만석거라고 명명한다. 

"관개의 이로움이 대단히 크지 않은가. 이 못을 파고 나서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앞 평야에서 수확하는 것이 이미 1000여 포(包)라고 한다." 하고, 이어 정자 이름을 '영화(迎華)'라고 지어 주었는데 매년 화성 사람들이 여기에서 취화(翠華)를 맞이한다는 뜻이고, 들을 '관길(觀吉)'이라 한 것은 '내려와 뽕나무가 적당한가를 관찰하니 점괘에 길하다 하더라.[降觀于桑 卜云其吉]'라는 뜻을 취한 것이고, 평(坪)을 '대유(大有)'라 하고 도랑을 '만석(萬石)'이라 한 것은 모두 풍년이 들기를 빈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일성록, 정조실록, 한글본 정리의궤를 통해 알 수 있다.

수원의 관문 효행길을 걷자_4
영화정

만석거는 현대에 와서 구조가 변경되어 공원화 되었고 장안문까지 가는 길가의 대유평과 관길야는 아파트단지로 변해 원래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어 안타깝다. 효행길은 장안문, 화성행궁, 팔달문, 매교, 상류천, 하류천, 황교, 옹봉, 대황교, 능원소화소, 유첨현, 안녕리, 유근교, 만년제, 현륭원으로 이어지지만 도시화로 인해 도심의 도로를 걸어야하고 수원시의 경계를 넘어가면서 끝난다.

효행길이 길기는 하지만 도심 구간을 제외하면 짧은 편이다. 노송길과 만석거 둘레길을 거닐고 새롭게 복원된 영화정에 들어가 정조 대왕이 만석거를 축조하고 대유평이란 둔전을 개간하고 뽕나무를 심었던 깊은 뜻을 헤아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수원이 정조 대왕의 도시인 것은 수원화성의 존재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수원화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었던 배후시설인 만석거, 대유평 등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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