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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역사문화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다있네!
갈대꽃 유혹 따라 나선 산책길에 만난 풍경
2014-11-17 06:45:18최종 업데이트 : 2014-11-17 06:45:18 작성자 : 시민기자   이대규

9일 한낮 창밖에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을 뜨면 가을 들판은 사라져 없고, 제3산업단지의 공장 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고 있는 고색동 들판이었다. 그 여백의 언저리에 덤으로 피어나 환호하며 깃발을 흔드는 철부지 같은 갈대, 그 유혹의 몸부림에 살며시 따라 나서본 발길이었다.

우리마을 역사문화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다있네! _1
화무십일홍이라고 하였지만 초가을부터 겨울이 다 오도록 흰머리 나부끼는 갈대만큼 질기고 숭고한 꽃도 어디 있으랴싶다

이런 삭막한 산업단지와 함께 아파트 주변에서 갈대꽃 잔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명성산이나 봉화산을 옮겨다놓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아니, 순천만의 갈대밭이 제아무리 좋다고 선전하여도 나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보였던 것이다. 목화솜처럼 하늘하늘 꽃봉오리 피어나는 갈대꽃을 바라보면 마음도 여유롭고 한결 부드러워진다.

갈대에 한껏 취해보며 그 공원길을 따라가면 중보들 공원이다. 이곳에는 풋살, 테니스, 족구, 배구, 게이트볼, 농구 등을 할 수 있는 저마다의 구장들과 중앙광장, 야외공연장이 있는 한편, 고색향토문화전시관이 들어서있다. 그러니까 제3산업단지의 조성으로 사라지고 없는, 이곳 큰말과 작은말 고색동들판의 농경문화 역사관인 것이다.

우리마을 역사문화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다있네! _2
마침 일요일의 날씨도 좋은 가운데 여러 구장에서는 학생들이 나와서 경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도 활기차 보었다

나는 궁금한 나머지 발길을 돌려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들어가 보았다. 삼각 모자를 쓴 유리 지붕 아래로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전시관 내부의 모습이었다. 사무실에는 일요일인데도 직원 두 명이 근무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개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곳 전시관을 통해 고색동에 살면서도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 수가 있었다. 우선 먼저 연대별로 사진과 그림을 통해 그 역사를 한눈에 볼 수가 있었다.

고색이라는 지명은 정말로 고색이 창연했다. 옛날 이곳에는 바닷물이 범람하였고, 이주를 하였다가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에 고향을 다시 찾아와 살았다는 의미에서 고색(古索)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수원 용복면에 속해 있었고, 옛 지명으로는 고색이, 뒷벌, 건너말(작은말), 비구재, 미룻돌, 배다리, 꼼짝우물, 매방아, 청나무, 오정, 움말, 중보평, 진들, 작심말, 대보들, 솔대백이 등으로 불렸으며 다양한 이름만큼 고분, 활터, 가마터, 우물터, 매방앗돌 등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색동은 노란 찰 진흙이 많아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많았고, 비가 오면 신랑이나 각시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황토에서 자란 쌀은 전국에서 밥맛이 제일 좋기로 유명했다고 하나, 확인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마을 역사문화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다있네! _3
우리마을 역사문화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다있네! _3

고색동이라면 지금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첫 번째로 농악놀이다. 고색동 전통농악은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꿋꿋이 이어왔다고 한다. 고색지역의 모든 민족행사의 근간이 되어 왔으며 농악이 없으면 자랑스러운 고색동 민속 줄다리기, 당제사(도당굿), 지신밟기 등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런 고색동 농악은 수원 화성 가락의 대표 가락으로 길가락(길군악), 고사가락(지신밟기,당제사), 다드래기, 상모가락, 춤가락, 두레가락(농사), 줄다리기가락 등 모든 가락이 상쇠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색동의 도당굿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고색동 코잡이 놀이와 함께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 고색동 도당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고색동 민속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정월 대보름에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도당에 들러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일년 농사의 풍년을 위한 당제를 지내고, 음력 시월 초에도 길일을 택하여 당제를 지내거나 마을의 액운 및 우환이 생기면 대규모의 도당 굿을 벌였다고 한다. 고색동 도당은 일제강점기에 수인선 철로가 부설되면서1937년에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왔다는 것이다.

역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인 고색동 민속 줄다리기 (코잡이놀이)는 신라시대 이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1796년 수원화성 축성이후 양반계층과 평민계층 모두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액을 막고, 일 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놀이로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겼다가 1995년 동민 및 청년회를 중심으로 복원하여 현재는 '코잡이놀이'라는 이름으로 수원시의 연례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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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리의 향토유적내지는 민속 문화행사 모두가 궁극적인 것은 풍년과 연계하여 호구를 위한 쌀이었을 것이다. 그 쌀이 시대가 바뀌어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우리는 그동안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논에 모를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모가 자라고 익어서 벼가 되고, 논에서 거둬들인 벼가-정선-제현-현미분리-석발-정미-제강-연미-선별-포장-제품이 되어 나오게 된다는 것은 농사를 등골이 휘도록 짓고 살아왔었지만 미처 알지 못했다.

방앗간의 종류 또한 옛날에는 어떻게 작동시키느냐에 따라 디딜방아, 퉁방아, 물레방아, 연자방아로 크게 나눈다고 했다. 디딜방아는 사람의 힘으로, 연자방아는 짐승의 힘으로, 퉁방아와 물레방아는 물의 힘으로 돌린다고 했다.

산업화로 사라져가는 고색동 농경사회의 역사유적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재현하며, 오늘에 전하려는 많은 노력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우리의 옛 뿌리를 통해 황폐해 가는 정신문화 건강을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곳 중보들 공원을 찾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전시관에 들러 상전벽해가 된 고색동을 한번쯤 보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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