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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에서..하늘에 닿은 정조의 효심
2015-06-27 12:45:01최종 업데이트 : 2015-06-27 12:45:01 작성자 : 시민기자   김연수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애절한 몸부림으로 참회의 눈물과 통한의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어야 했던 비운 정치가 사도세자(주촌 장조), 어버이의 죽음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가슴으로 새겨야 했던 어린 세손(정조),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 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에서 회한의 눈물 삼켜야 했을 어버이(영조)의 운명적인 삶, 정치적인 현실 앞에서 겪어야 했던 세 남자의 운명은 지켜야 할 천륜마저 저버린 것인가? 무엇을 위해 이들은 이렇게 가슴 아픈 운명으로 살아야 했을까? 백성을 위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위해 풍랑이 휘몰아치는 권력의 틈바구니에 맡겨진 운명이었을까? 

인고의 세월을 굳건히 이겨내고 왕좌에 등극해 혼탁해진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우렸던 개혁정치가 정조임금과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된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건릉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상념에 잠겨 본다. 

융.건릉에서..하늘에 닿은 정조의 효심_1
융릉

융.건릉은 사적 제206호로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화성시 안녕동 187-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융릉 사도세자(주촌 장조)는 영조(조선21대)임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자에 책봉되어 대리청정의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적 이상을 달리하는 노론(반대파)의 반발로 결국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했다. 죄목은 정신이상으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스님)을 궁녀로 만들었으며, 아무도 모르게 20여 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미행(몰래 다님)하는 등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 들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가슴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던 정조는 즉위 하자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아버지 영우원(사도세자)을 화산으로 옮겨와 현륭원이라 하였다. 이후 현경왕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여 장조로 추촌하여 융릉으로 높였다.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으며 모란과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석등은 전기 왕릉에 세워진 8각과 후기 숙종과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었다. 무덤을 지키는 석인도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 모양을 살짝 들어 올려 사실적이고 시원한 분위기를 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인 양식을 도입함으로 인하여 19세기 이후 무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융.건릉에서..하늘에 닿은 정조의 효심_2
곤신지

융릉 아래에는 곤신지라는 원형 인공 연못이 있다. "곤신지는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 조성되었으며, 곤신방(坤申方 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生方: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 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임산배수로 명당자리는 앞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곤신지를 뒤로하고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건릉에 다다랐다. 건릉은 융릉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건릉은 융릉 동쪽 2번째 언덕에 조성되어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지금의 서쪽으로 옮겨 오면서 왕후와 합장했다. 

융.건릉에서..하늘에 닿은 정조의 효심_3
건릉

정조(건릉)는 효심이 지극한 군주였다. 또한 무예에 능통하여 말 타기와 활쏘기를 즐겼으며, 군사훈련을 강하여 무치(武治)에 비중을 두었고, 문치(文治)를 두루 아우르는 개혁정치를 펼쳤다. 
무엇보다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남 달랐다. 원륭원의 울창한 숲에 송충이가 번식하여 솔잎을 갉아 먹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단숨에 릉을 찾아 송충이를 잡아 오라 하여 "내 어찌 미물이지만 나의 효심을 몰라준단 말인가, 네가 내 아버지 산소에 솔잎을 갉아 먹을 수 있느냐, 차라리 내 오장 육부를 먹어라" 하고는 그 송충이를 삼켜 버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솔개와 까마귀가 날아와 송충이들을 모두 잡아먹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정조임금의 효심이 하늘에 닿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융.건릉에서..하늘에 닿은 정조의 효심_4
어린이집 원생 나들이 수업

융.건릉을 둘러보고 오솔길에 나서자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여름날의 뙤약볕을 가려준다. 시원한 바람과 그늘이 드리우진 길을 따라 어린이집에서 나들이 야외 수업을 나온 원생들이 선생님과 친구의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재잘대며 걷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고 있으니 권력의 무상함이 젖어온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왕과 세자이기 이전에 부자(父子)사이였던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손자의 사랑은 조건 없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 영조와 세손 정조의 관계가 가슴을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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