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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성문위엔 연못이 설치돼 있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59-수원화성에만 설치한 오성지(五星池)
2011-01-12 11:02:17최종 업데이트 : 2011-01-12 11:02:1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최고의 성을 만들기 위한 한 방법

화성 성문위엔 연못이 설치돼 있다?_1
장안문의 옹성에 설치한 오성지-사진-수원시청 이용창


우리나라의 성곽은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성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쌓는다. 
그러므로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며, 성문을 보다 잘 지켜내기 위해서 옹성을 쌓는다. 

그런데 이 옹성이 어느 한쪽으로든 문 없이 입구를 열어 놓으면 상관없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의 경우엔 반원형의 밀폐된 구조로 조성하면서 옹성의 가운데에 문을 내었다. 이 문은 꼭 지켜야 한다. 옹성문이 함락되면 성문이 위험하고 성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그 싸움은 진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에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옹성문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도입된 방법이 물탱크에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옹성문 위에 설치한 오성지이다. 적의 화공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한 방법인 셈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낸다. 오성지를 설치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라고 적었다. 장안문의 북옹성에 설치한 오성지를 설명한 글인데, 팔달문의 남옹성에도 오성지를 설치하였고 그 크기도 비슷했을 것이다. 

오성지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는데 옹성문이 없는 창룡문과 화서문에는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작은 규모지만 중요한 암문 중에서 동암문과 북암문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서남암문에도 설치된 것으로 그림에 그려졌고 실제로도 구멍이 뚫렸으나 그에 대한 설명은 없어 적들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위장시설이 아닌가 한다. 
서남암문의 위에는 서남포사를 지었고, 서남포사에는 구들방 한 칸을 두었으므로 오성지의 물통을 설치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화성 성문위엔 연못이 설치돼 있다?_2
북암문과 오성지
 

다산이 잘못 시공된 오성지를 비판하다

오성지는 본래의 제도와 달리 시공 과정에서 변질되었다. 이를 눈 밝은 다산이 보았고, 또 글로 남겨놓았다.
"《무비지(武備志)》의 '성제(城制)'에서 논한 오성지는 곧 누수통과 같은 종류이다. 올 가을에 나는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가는 길에 화성을 지나면서 옹성문 위에 가로로 다섯 구멍이 뚫린 것을 보았는데, 마치 요즘의 성가퀴에 구멍이 세 개 있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것이 오성지이다'라고 한다. 아! 성문 위의 연못에도 가로로 구멍 뚫린 것이 있는가? 오성지라는 것은 물을 터 내려서 적이 성문을 태우려 할 때 이를 막는 것이니, 그 구멍을 곧게 뚫어서 바로 문짝 위에 닿게 하여야 쓸모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을 쌓는 일을 맡은 사람이 도본(圖本)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어 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를 찾는다는 격이다."-'여유당전서' 중 '다산시문집'

다산이 화성을 답사한 이 해는 정조 19년(1795), 34세의 다산에게 영욕이 교차된 해였다. 
정월에 품계가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그리고 2월17일에는 병조참의에 제수 되어 다음 달인 윤 2월 13일에 화성의 행궁에서 벌어진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 정조와 함께 참여한다. 

또 한 달쯤 지난 3월 20일에 우부승지에 올랐다가 7월에 터진 주문모신부 사건에 연루되어 7월 26일 종6품의 금정도찰방으로 외보된다. 
이때 화성을 지나면서 오성지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하는 것이다. 
'성가퀴에 원총안 2, 근총안 1개의 세 구멍과 오성지의 다섯 구멍이 다를 게 뭐냐. 그림책을 뒤져서 말은 찾겠지만 무슨 수로 천리마를 찾겠느냐.' 

이런 힐난 속에는 오성지의 제도에 대해 깊이 살펴보지 않은 채 그림만 보고 시공하였다는 비판이 숨은 것이다. 또한 품계가 강등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자신의 신세한탄도 한 자락 들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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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문과 오성지
 

장안문의 북옹성은 을묘년(1795) 2월 27일에 완성되어 혜경궁의 회갑을 지켜본다. 여기에 다산이 참석하였으니 북옹성에 딸린 오성지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옹성이 완성된 것은 같은 해 5월 20일이다. 다산은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이 모두 완료된 시점인 7월 하순에 다시 수원을 방문하여 오성지를 꼬집었다. 

무늬만 오성지, 실제론 철판을 씌운 성문

그러나 '성을 쌓는 일을 맡은 사람들'의 생각은 다산과 약간 달랐을 것이다. 화성의 4성문과 2옹성문, 그리고 5암문의 문짝에는 모두 철엽(鐵葉-철판)이 씌어져서 화재로부터 기본적인 방어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적들이 문 앞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 위험하다. 그래서 다산의 지적은 적절한 것이지만, 성역 담당자들은 나무문에 두꺼운 철엽을 씌웠으므로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옹성 문에 414편, 남옹성 문에 410편의 철엽이 들었다고 기록했으니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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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암문의 무늬만 오성지
 

그러면 왜 굳이 오성지를 만들었을까? 더구나 지금의 모습들은 어느 오성지라도 구유처럼 생긴 물통이 하나도 없다. 이는 아마도 적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는 전략 차원의 위장술이 아닌가 한다. 
애초에 나무문으로 설계하여 오성지를 설치하려다가 철판을 씌우기로 설계가 바뀐 다음에는 굳이 기능적인 오성지보다는 무늬만 '오성지'인 오성지를 만들지 않았을까? 어쨌든 화공만 피하면 되니까. 

수원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쌓은 성이다. 즉, 최후에 쌓은 성이어서 최고의 성곽이 된다. 예전의 제도를 비교분석하여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성제에서도 취할 것은 과감하게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심돈이나 오성지 등 몇몇 시설은 수원화성만이 지닌 문화유산이다.
염상균/문화유산 답사전문가, 화성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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