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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걸작, 융릉에 담긴 정조의 마음
염상균의 수원이야기-55
2010-11-29 17:15:31최종 업데이트 : 2010-11-29 17:15:3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조선 최고 걸작, 융릉에 담긴 정조의 마음_1
융릉 전경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영우원)를 양주군 배봉산에서 수원부의 뒷산으로 옮기고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고 바꾸었다. 새 수원으로의 이주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1789년은 조선 22대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되는 해이다. 이 해에 정조는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된다. 불쌍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영우원)를 옮기기로 작정한 것이다. 
전부터 사도세자의 묘소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의견은 많았으나 즉위한 지 13년이 되도록 실천하지 못했던 것인데, 거기에는 할아버지 영조 임금과의 약속과 반대 세력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던 탓도 컸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해 거론하는 자는 대역 죄인으로 다스린다는 추상과 같은 영조의 엄명이 내렸고,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를 지키겠다고 할아버지 앞에서 굳게 약속하였다. 왕권이 확립되면서 정조는 국정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무엇보다 불쌍하게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싶었다.

아버지의 묘소를 어디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을 찾은 끝에 수원부의 북쪽 화산이 선정되었다. 이곳은 조선 17대 효종 임금의 능 자리로 풍수지리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추천하였던 곳이고, 더구나 효종을 닮았다는 평을 듣던 사도세자가 효종을 흠모하던 나머지 직접 와봤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새 묘소 자리로 추천된 여럿 중에서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자명해진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가 도사렸으니, 바로 새 묘소 자리 앞 수원부의 관아와 백성들의 집을 어디로 옮길 것인가에 관한 문제였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은 군주이다. 또한 학자를 우대하여 규장각을 세우고 책을 많이 출판하게 하는가 하면, 자신도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사람이다. 당시 정조와 학자들이 주목한 책 중에서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쓴 '반계수록'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실학적인 입장에서 조목조목 서술하였는데, 그 중 '군현제'의 수원부 대목은 정조와 신하들로 하여금 무릎을 칠만한 내용이 들어갔다.

지금의 수원보다 북쪽으로 20리 쯤 올라가서 팔달산 근처에 자리 잡고 황무지를 개간한다면, 훨씬 나은 고장이 될 것이며 큰 도시로 발전할 것이라는 의견을 담았던 것이다. 정조는 읍치소를 옮기고 백성들의 집을 옮겨야 하는 불편과 많은 비용을 감수하고 수원을 반계 유형원의 의견대로 새 고장으로 옮긴다.

송충이를 잡아라

조선 최고 걸작, 융릉에 담긴 정조의 마음_2
융릉 정자각 소맷돌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새로 조성한 현륭원(지금의 융릉)에 정조의 마음이 함께 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여름에 뒤주 속에 갇혀 여드레 동안이나 굶주림에 몸부림쳤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조였다. 열 한 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자신이기에 더욱 괴로웠으리라.

현륭원을 조성한 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어 그 이름값을 해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아버지의 묘소를 화려하게 가꾸어서 슬픈 영혼을 달래려는 마음이었다.

또, 자신의 초상화(어진御眞)를 재실에 걸어 놓게 하여 자신이 늘 묘소 앞에서 참배하는 듯한 효과를 거두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백성과 신하들에게 자신의 효성을 강조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에 대한 시위의 성격도 컸다. 

조선 최고 걸작, 융릉에 담긴 정조의 마음_3
문인석과 무인석


현륭원 자리는 선조 임금의 능자리로 추천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효종 임금의 능 후보였던 만큼 언제고 왕실의 능이나 묘소로 쓰일 확률이 높았다. 누구라도 묘를 쓰지 못하게 하고 소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봉표를 해 두었던 곳이어서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아마 이 점도 정조가 이곳에 현륭원을 조성하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어느 해인가 송충이가 극성을 부려 솔잎을 갉아먹는 바람에 소나무들이 죽어갔다. 참배 길에 이 모습을 본 정조는 송충이를 잡아 깨물면서,
"네가 아무리 미물이라 하지만 어찌 아버지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몰라주느냐!"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러자 화산의 송충이는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조의 화산 소나무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과장된 야사일 뿐이다.

송충이가 극성을 부린 것은 사실이었다. 
1798년 정조는 수원과 주변 백성들에게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하였고 수고한 사람들과 감독자들에게 상을 내렸다. 이러니 송충이가 모두 자취를 감출 수밖에. 모아들인 송충이를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정조는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불에 태워 죽이거나 땅에 묻어버리지 않고 바다에 던져 버리게 한다. 직접 죽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바다에 빠진 송충이들은 어차피 죽게 된다. 솔잎을 먹을 수 없으므로. 

석물 조각에 담긴 정조의 마음

조선 최고 걸작, 융릉에 담긴 정조의 마음_4
석마의 두 다리 사이에 새긴 난초와 영지
 

융릉의 석물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40기의 조선왕릉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다. 
당대가 조선왕조 500여 년 중 최고의 문화전성기였던 탓도 크지만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조각으로 되살아난 것이리라. 문인석과 무인석은 실제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고,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의 신계(神階-신이 오르내리는 계단) 소맷돌 구름무늬는 어느 왕릉의 그것과 비교해도 최고로 아름답다.

봉분을 조성할 때도 정조는 최고의 정성을 기울인다. 세종대왕의 왕릉 간소화 정책으로 생략하기로 한 병풍석과 와첨석도 과감히 설치하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왕릉이 아닌 원(현륭원)이므로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왕릉에 설치하는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융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움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무인석 옆의 석마(石馬) 두 다리 사이 빈 공간에도 난초를 새겼는데 이 또한 걸작이다. 화면의 왼쪽에 살짝 치우쳐서 그리고 새겨낸 모습이 한 폭의 난초 그림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또한 상서로움의 대명사이면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영지버섯도 새겨 넣어서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화성시의 팔경 가운데 융건백설은 융릉과 건릉에 내린 백설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것인데 이제 바야흐로 눈이 내리는 계절이니 융릉에 한 번 다녀올 일이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이사, 문화유산 답사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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