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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아버지 무덤 아래 묻어주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56
2010-12-06 09:08:28최종 업데이트 : 2010-12-06 09:08:2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정조의 성격대로 소박해서 더 좋은 건릉

정조 아버지 무덤 아래 묻어주오_1
건릉 전경


정조(正祖,1752~1800)와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 김씨의 합장릉 건릉에 간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으로 세종대왕에 비견될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참변을 11세 소년기에 목격하였고, 5세였던 세자를 잃었으며 자신도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버리는 등 불운한 임금이었다.

정조는 210여 년 전인 1800년 6월 28일 승하하였다. 1752년 9월 20일에 탄생하였으니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승하한 지 5개월여 만인 11월에 장사 지냈는데 그곳은 지금의 건릉이 아니고 융릉(당시의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인데 옛 군기고 터이다.

나를 아버지 무덤 아래 묻어주오

죽어서도 효도를 다하겠다고 아버지 묘원 앞에 묻히기를 원하였던 까닭에 선택된 장소였다. 
이는 세종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은 본래 서울 강남구 대모산 아래에 조성하였다. 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태종의 능 헌릉 아래, 지금의 헌· 인릉 영역이다. 그러나 세종 사후에 불거진 왕실의 여러 불상사로 천장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자리한 곳이 지금의 여주 영릉이다.

그러나 처음 조성된 건릉은 풍수지리에 식견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그곳은 지대가 낮고 평평하여 성인을 오랫동안 모셔 둘 곳이 못 된다고 걱정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질고 습하여 사철 내내 마르지 않으며,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가 갖추어지지 않고 안산(案山)이 참되지 않는가 하면, 독성(禿城)이 높이 솟아서 바위가 쫑긋쫑긋 서 있고 넓은 들판이 바로 연하고 큰 시내가 바로 흘러 달아나니'몹쓸 자리라고 하였다.

1821년 3월 9일 왕비였던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한다. 지아비인 정조보다 한 해 늦은 1753년에 태어났으므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여러 곳의 길지를 비교한 끝에 융릉 서쪽 옛 향교 자리를 골라 9월에 장사 지냈다. 염려가 많았던 정조의 능을 옮겨서 장례하고 왕후를 부장하였으며 능호는 종전 그대로 건릉이라 하였다.

정조 아버지 무덤 아래 묻어주오_2
건릉 정자각 소맷돌
 

왕이나 왕비의 장례 기간이 5~6개월로 길다. 4품 이상의 사대부는 3개월 만에 장례를 지내고, 일반 백성들일지라도 달을 넘겨 지내는 유월장(踰月葬)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유월장을 꼭 지키지 못할 때도 생겼다. 이렇게 유월장을 지내지 못하고 그 달에 장례 모시는 것을 환장(還葬)이라고 한다. 상주가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달을 넘기지 못하고 환장을 하겠는가? '환장할 놈'이라는 비속어의 출발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정조의 애민정신

정조는 효성을 바탕에 깔고 백성의 편에 서서 합리적인 국정을 도모하였다.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 융릉)을 13차례나 찾아오는 등 원행과 능행을 반복하며 궁 밖에 나서 민심을 읽어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길에서 상언(上言)을 받아 민원을 3355건 처리하였는데 이는 역대 임금 가운데 최고였다. 또한 상소도 많이 받아들였음은 물론이고,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하여 국왕의 선정의지가 백성에게 전달되는지를 확인하였다.

내게 참 아름다운 손님-아유가빈

정조 아버지 무덤 아래 묻어주오_3
건릉의 석물들


정조는 백성에 대하여, 마치 부모가 자식 걱정하듯이'늘 다칠까 걱정하듯 살폈다(視之如傷)'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서 급제한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술을 내리고 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였는데, 그 술잔 복판에는'아유가빈(我有嘉賓)-내게 참 아름다운 손님'이 전서체로 새겨졌다. 
유생들은 아름다운 시를 써서 왕의 은혜를 노래하였고, 왕은 그들의 명시를 모아 책을 엮고 '태학은배시집(太學銀杯詩集)'이라고 이름 붙였다. 임금과 신하가 아름답게 만나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그 '팀웍'의 결정체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건설로 드러난다. 실제 공역 기간 28개월이라는 놀라운 집중력을 결집시켜 5.5킬로미터의 성곽과 행궁의 증축을 이끈 것이다. 게다가 축성 과정의 전말을 모두 정리하여 '화성성역의궤'로 편찬하였고,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베풀고 역시 그 전말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담았다. 이로써 수원화성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기록을 모두 지니게 되었다.

집집마다 부자가 되고 사람마다 즐거운 도시 수원

화성을 완공한 이듬해인 1797년 1월의 행차에서는 새도시 수원이 나아갈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집집마다 부자가 되고 사람마다 즐거운) 여덟 글자로 압축하였다.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한 가정의 최대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요, 한 개인은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 아닌가? 
그뿐인가. 각종 학문 및 농사와 무예, 의학에 관련된 책까지 두루 발간하게 하였고, 그 자신도 100여 책이나 되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던가? 실로 기록을 중시하고 두려워 한 군주라 하겠다.

반듯한 생활이 국정을 바르게 이어가고

자신을 늘 반성하여 단속하며 솔선수범하는 자세 또한 훌륭했다. 반듯한 생활과 태도를 평생 견지했으므로 종묘에 올린 묘호는 정종(正宗)이라고 하였다. 
왜 왕이 '바름(正)'인가? 도학(道學)의 바름과, 의리(義理)의 바름인데,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르게 한 것은 나라 다스리는 법도와 교훈의 바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인이란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상대가 바르게 되는 것이다.'라고도 하였는데, 이렇듯이 정조의 일생은 '바름' 한마디로 모아진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어서 지천명의 문턱에서 세상을 버린다. 아울러 그가 진두지휘하며 이끌어나가던 민본의 개혁정치도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왕이 이러니 왕후 또한 마찬가지여서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운가 하면 공순하고 검소하였다.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좀체 기쁜 마음이나 성난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일을 잘못하면 꾸짖지는 않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는데 그러면 그들이 더 부끄러워하고 황공해 할 뿐이었다. 
옷이나 그릇들도 겨우 쓸 정도면 만족하였지 욕심을 부리거나 좋은 것을 찾지는 않았다.

정조의 업적에 미치지 못하는 석물들

정조 아버지 무덤 아래 묻어주오_4
수원 고읍성(토성)


건릉의 석물은 융릉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보인다. 정자각의 소맷돌에 새긴 구름도 얇게 조각 되었고, 문석인과 무석인의 묘사도, 혼유석을 받친 북 모양의 돌에 새긴 무늬도 한 단계 내려간다. 역시 어느 능이나 묘소는 조성한 시대와 주도한 사람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교훈을 심어준다. 

건릉에 올라 봉분과 석물을 살펴보고 산마루턱에 오르면 토성을 밟게 된다. 옛 수원을 둘러쌓았던 읍성이다.
잎을 모두 버린 나목, 쌀쌀한 바람이 건릉 주변을 맴돌고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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