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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희망, 병자호란의 광교산 전투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33
2010-04-01 16:25:01최종 업데이트 : 2010-04-01 16:25:0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한 줄기 희망, 병자호란의 광교산 전투_1
비로봉 등산로에 보이는 안내판
 
광교산은 수원의 북풍을 막아주는 산줄기로서 신도시 수원을 아늑하게 해주는 산이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도 광교산 줄기 끝에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의 수원사람 대부분이 즐겨 찾아 심신을 달래는 명산이기도 하다. 

광교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대개는 경기대 쪽에서 형제봉을 거치거나 광교 종점에서 시루봉으로 오르는 등산코스를 애용한다. 
형제봉과 시루봉 사이에는 비로봉이 수려한 모습으로 앉았는데, 비로봉 서쪽 수원시 땅에는 창성사가, 또 동쪽 용인시 땅에는 서봉사가 자리를 잡았었다. 두 절 모두 고려의 국사를 배출한 곳이어서 유서가 깊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폐사가 되어 잡목 속에 방치되었다. 

비로봉은 불교에서 말하는 비로자나불을 의미하는 것이니 두 절과 관계가 깊다고 하겠다. 
비로자나불은 세상의 모든 곳을 두루 비춘다는 의미여서 그런지 비로봉에 서면 형제봉과 시루봉을 모두 조망하게 된다. 
비로봉 아래 남쪽 벼랑에는 커다란 바위가 억겁의 세월을 견디며 섰다. 크기도 만만치 않지만 생긴 모습도 수려해서 광교산의 정기가 뭉친 듯한 곳이다. 불과 10년여 전만 하더라도 이 바위 주변에서 기도하던 무속인과 시민이 가끔 보였을 정도로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의 명장 김준룡

이 수려하고 잘 생긴 바위에는  '충양공김준룡장군전승지(忠襄公金俊龍將軍戰勝地)'라고 새긴 글씨가 보인다. 
자연 석벽을 위는 동그랗게 아래는 네모지게 다듬어 큰 글자를 새기고 좌우에는 작은 글자로, '병자호란공제호남병, 근왕지차살청삼대장(丙子胡亂公提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새겼다. 
병자호란 때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를 이뤄낸 김준룡(金俊龍, 1586~1642) 장군과 그 일을 기리는 내용이다. 

한 줄기 희망, 병자호란의 광교산 전투_2
김준룡 장군 전승지 암벽

김준룡 장군은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영주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재임하던 중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임금을 구원하기 위해 올라온다. 들르는 고을마다 근왕병을 모집하였고 이내 광교산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청나라 장수 공경(孔耿)의 부대와 싸워 청나라 태조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 등 세 장수와 많은 적을 무찔렀다. 병자호란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포위당한 남한산성의 인조 임금과 구원병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인조임금과 조정은 나날이 어려움에 떨었다. 
성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고 군량미며 무기도 열악한 상태였다. 더구나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가운데 얼어 죽는 자가 생길 정도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온다. 
그는 수원과 용인사이에 있는 광교산에 주둔,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알려 남한산성 안의 고립된 사람들에게 안정을 찾아주었다. 
당시 남한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고 안팎이 막히고 단절된 상태라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김준룡 장군이 승리를 거둔 곳을 오랑캐가 항복한 곳이라는 의미로 호항골[胡降谷]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준룡 장군을 비롯한 2000여 군사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 화살이 다 떨어졌고 양식도 모자라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으므로 수원으로 물러나 물자를 보충하고 다시 진격하려고 한다. 그러자 군사들이 죄다 흩어져버려 결국 실패했고 이는 그가 파직당하는 빌미가 된다. 

시기와 질투로 유배 생활
한 줄기 희망, 병자호란의 광교산 전투_3
전승지 비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김준룡 장군 뒤에 남아서 적극적인 공격을 미루던 감사 이시방은 김준룡이 물러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지원하는 대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러 간다는 핑계로 공주로 달아난다. 
금강 다리를 철거하여 적이 들어올 길을 끊고 군사들을 차례로 철수하여 돌려보내 버리면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임금을 구원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김준룡 장군의 전공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유배 길에 오르도록 한다. 

이때는 이미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여 인조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를 행하는 등 우리 역사 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을 겪은 후였다. 이후 김준룡 장군은 사면을 받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장군의 묘소는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이 마주 보이는 곳에 썼다. 본래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묘를 썼는데 도시화로 인해 197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정조가 인정한 김준룡 장군의 무공

충양공이라는 시호는 정조 16년인 1792년에 가서야 내렸는데 이는 장군이 세상을 버린 지 150년이 지나서다. 
정조가 김준룡 장군의 무공을 인정해 준 결과이다. 비로봉 암벽에 전승지 비를 새긴 것도 화성을 쌓으려고 수원에 온 축성 책임자 채제공이 김준룡 장군의 승전을 듣고 새기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냉엄한 현실인식과 국제정세의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명분과 실리라는 두 수레바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움직여 나가야 할 것인가? 명분에 얽매여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실리를 취해 백성과 나라를 구원할 것인가? 병자호란의 치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반복적으로 준다.  

광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제 그 수가 많아져서 휴일이면 시내의 번화가처럼 붐빈다. 
형제봉 쪽에서 비로봉을 오르다 보면 계단이 끝나는 지점 바로 위에 전승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고 이정표도 세웠다. 

그러나 이 유서 깊은 명승지에 다가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저 한 번 가봤으니까 하고 생략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바위 주변에 앉아서 형제봉을 바라보는 장쾌함과 온몸으로 느끼는 암벽의 기운은 이루 다 형용하지 못한다. 

광교산은 수원의 허파이면서 전승지로서의 격도 갖춘 명산이다. 광교산에 오를 때마다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 비를 찾아 도시에서 찌든 심신을 재충전하는 것도 의미가 크지 않겠는가?  
염상균/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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