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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사당 터가 서울대병원 안에!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38
2010-05-07 16:32:41최종 업데이트 : 2010-05-07 16:32:4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사도세자의 사당 터가 서울대병원 안에!_1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사도세자의 불쌍한 죽음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는 조선 최고로 엽기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윤 5월 13일에 뒤주에 갇혀 21일에 세상을 떴으니 여드레 동안이나 굶어 죽은 것이고, 윤 5월이면 양력으로는 6월 말이나 7월 초쯤이니 찌는 듯한 더위에 좁은 공간에서 쪄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것도 자신을 낳은 아버지에 의해 당한 죽음이었으므로 더욱 서글픈 인생이다. 그래선지 많은 무속인들이 사도세자를 신으로 모신다. 그 한 많은 신을 위해줌으로써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뒤주를 놓아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곳은 창경궁 정문의 남쪽에 설치한 선인문 안 뜰이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동물원과 식물원을 경영했을 때 동물원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과천대공원으로 이전하면서 창경궁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래도 선인문 안뜰 사도세자가 흉변을 당한 곳은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 고목이 된 나무들이나 그 사건을 알까.

아름다운 궁궐의 동산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짓자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1776년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곧 아버지의 사당인 경모궁을 창경궁 동쪽 함춘원에 다시 짓는다. 본래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1764년,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지었다가 다시  동부 숭교방(崇敎坊)으로 건물을 옮겨 수은묘(垂恩廟)라 했던 것을 또 다시 장소를 옮겨 새로 지은 것이 경모궁(景慕宮)이다. 

사도세자의 사당 터가 서울대병원 안에!_2
경모궁 정문인 함춘문

함춘원(含春園)은 창경궁의 동쪽 언덕에 가꾼 왕실의 정원이었다. 봄을 머금었다는 뜻대로 미래적이고 희망적인 상징을 지녔다. 동궁이 세자를 가르치고 키우는 궁궐이듯이.
이 아름다운 동산에 정조는 아버지의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타고난 효성대로 정조는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찾아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작은 가마를 타고 적은 수의 수행원들만을 대동한 간소한 행렬이었다. 게다가 매년 아버지가 뒤주에 갇혔던 5월 13일부터 21일까지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에는 아예 경모궁에 살다시피 했다. 뒤주에 갇혔던 아버지의 심정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북쪽의 월근문은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정조 3년(1779)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경모궁과 함춘원 터에는 서울대병원이

일제강점기 일제는 이 아름다운 함춘원에 1924년 경성제국대학교 의학부를 설치한다. 그래서 그 원형이 파괴되기에 이른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를 잡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경모궁이 들어섰던 유서 깊은 이 장소는 지금 삼문만 남아서 옛 자취를 알려주고 본전 건물이 섰던 자리는 축대만 남았다. 게다가 병원의 쓰레기 배출구가 코앞이어서 불쾌한 느낌마저 안겨준다.

경모궁 제사를 기록으로 남겨라

사도세자의 사당 터가 서울대병원 안에!_3
경모궁 터

정조는 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제사를 올리면서 후대에까지 이어지라는 마음에서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도 기록하게 하였다. 권1 도설(圖說)에는 악기도설(樂器圖說)·제복도설(祭服圖說), 권2 사전(祀典)에는 오향제축문(五享祭祝文)과 작헌례축문(酌獻禮祝文)이 수록되었다. 권3 고실(故實)에는 정호의(定號儀)부터 가례(嘉禮)와 대리의(代理儀)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수록되었고 각 항에는 절목(節目)을 기록하였다.
권4 금제(今制)는 경모궁 보수기록과 1776년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릴 때의 기록, 그리고 1783년(정조 7) 4월 1일에 수덕돈경(綏德敦慶)이라는 존호를 올릴 때의 기록이다. 책은 1784년 필사본 4권 3책으로 꾸몄는데 경모궁 제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경모궁제례악도 만들어라

게다가 정조는 종묘제례악처럼 경모궁제례악도 만들게 하였다. 비운으로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음악으로 종묘제례악을 축소, 변형하여 만든 것이다. 그 효성이 대단했음을 알게 된다.
경모궁의 제사는 조선말까지 이어지다가 고종 때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면서 광무 3년(1899) 11월에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신위를 종묘로 모셨다. 사실 상 경모궁은 용도폐기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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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 계단과 소맷돌
 
역사에 가정은 허용되지 않지만, 사도세자의 서글픈 죽음이 없었다면 오늘의 수원은 어찌되었을까? 과연 새도시로서의 수원이 존재했겠으며,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쌓기나 했을까? 경모궁 축대와 구름이 새겨진 계단의 소맷돌을 바라보며 수원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병원과 학교 건물 사이에 천덕꾸러기처럼 남은 경모궁 흔적을 보며 씁쓸한 상념에 젖는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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