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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염상균의 수원이야기/21
2010-01-04 13:34:58최종 업데이트 : 2010-01-04 13:34:5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공석면(空石面)의 숙지산(孰知山)과 여기산(如岐山)

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_1
축만제(서호)에서 바라본 여기산 모습

화성은 북암문 근처의 50여 미터를 제외하고 모두 돌로 쌓았다. 성 전체의 길이를 4600보라고 기록하였으므로 1보에 1.2 미터를 곱하면 약 5.52 킬로미터 가량 되는 셈이다. 

성벽의 높이는 구간에 따라 3미터에서 6미터가 되니 이렇게 많이 소요되는 돌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우리나라는 곳곳에 좋은 돌이 많은 나라이지만 현장 근처에는 돌이 없다고 알려졌으므로 멀리서 구해온다는 것은 당시의 운반 사정상 어려운 일이다. 

화성의 축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정조 17년(1793) 12월 초6일 정조는 돌맥을 찾아냈다는 화성유수 조심태를 불러 돌을 떠내는 곳과 화성의 거리를 묻는다. 조심태는 3리 또는 7리 되는 곳인데 도로가 매우 평탄해서 운반하기가 쉽다고 보고한다. 

그러자 총리대신 채제공이 뒤이어 아뢰기를,
"팔달산 서변에 또 한 산이 있는데 중턱에 석재가 이미 많고 또 좋아서 무진장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산 이름은 숙지(孰知)이고 면 이름은 공석(空石)입니다. 산과 면의 이름이 심히 우연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며, 귀신이 아끼고 감추어 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임금님의 효도가 하늘에 이르러서 그런가 합니다."

정조는 기왕에 쌓는 새 성이니 만큼 반듯반듯한 돌로 멋지게 쌓고 싶었다. 그런데 화성 근처에 돌이 있는지,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는지 궁금하였는데 화성 주변을 현장 답사하고 온 조심태의 보고에 마음을 놓았다. 게다가 채제공은 한 술 더 떠서 임금의 효도까지 거론하고 나섰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화성성역은 돌 뜨는 것으로 시작

한 달 후쯤인 정조 18년(1794) 정월 초 7일 화성 성역은 고유제를 지내고 돌을 떠내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는다. 
화성 성역에 필요한 돌을 떠내는 부석소는 모두 다섯 군데였다. 숙지산과 여기산에 각각 두 곳을 설치하고 권동(權洞)에 하나를 두었다. 숙지산은 지금의 영복여중고와 화서 아파트 등이 있는 곳이고 여기산은 농촌진흥청의 뒷산이다. 권동은 화서동과 고등동의 수원역 근처 경계지점이고.

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_2
숙지산 부석소-왼쪽 끝에 쐐기 홈이 보인다.

처음 화성을 쌓으려고 계획할 때 이 지역에서는 돌이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벽돌을 써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토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런데 화성부의 서쪽 5리 쯤 되는 공석면에 숙지산과, 또 그 서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여기산이 있다. 처음에는 바위가 흙에 덮여서  한 줌의 돌이 있는지도 몰랐으나, 돌맥을 찾아 들어가자 그대로 이리저리 걸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후 권동에서도 돌맥을 찾았는데 두 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또 서성의 터를 닦던 날 팔달산 왼쪽 등성이에서부터 남쪽으로 용도에 이르기까지 6백~7백보가 모두 돌맥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성의 한쪽 면은 제자리에서 캐낸 돌을 사용하였다.
대체로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았으나 결이 조금 더 가늘었다.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것보다는 더 거칠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오는 내용이다. 
또 돌을 캔 숫자를 모두 계산해 보면, 숙지산 돌이 8만1100여 덩어리, 여기산 돌이 약 6만2400여 덩어리, 권동의 돌이 약 3만200여 덩어리, 팔달산 돌이 약 1만3900여 덩어리였다. 
공석면의 숙지산과 여기산에서 캔 돌을 합하면 14만3500여 덩어리가 되어 전체의 76.5 퍼센트가 되고, 권동과 팔달산에서 캔 돌을 합하면 4만4100여 덩어리가 되어 전체의 23.5퍼센트가 된다. 
대부분의 돌이 공석면에서 캐낸 것이 되어 공석면은 그야말로 공석(空石)이 된 것이다.

엄격한 석재의 관리
정조 19년(1795) 4월 18일 성역도청에서 부석소에 보낸 공문을 보면,
 ' 부석소로 말하면 대.중.소의 돌덩이 가격을 한결같이 작년에 마련한 바에 따르며, 아울러 잡비도 과연 정식에 어긋나지 않는 것인지 살피기 바랍니다. 현재로서는 돌 떠내는 일이 이미 한 달이 지났으니 우선 상세하게 기준에 맞는가를 계산하고 , 만약에 기준이 되는 정식에 미치지 못하거든 패장을 곤장 쳐서 다스린 뒤에 기술자들에게 정식의 기준 수에 따라 돌을 떠서 납입하게 하기 바랍니다.
돌을 사들이는 일에 관하여도 오늘을 기준으로 별도로 규정을 세우고 패장을 선정하여 그 처소를 나누고 각각 팻말을 세워 돌덩이를 쌓아두고 팻말에다 패장의 성명을 기록하기 바랍니다. 매일 돌 사들이는 수효를 대.중.소의 가격에 따라 공사 기록에 달아 적고 제출하여 닷새에 한 번씩 적발하는 근거로 삼기 바랍니다.
이 일은 그 성격상 실지와 거짓이 서로 뒤섞일 폐단이 가장 많으니 진실로 지조 있고 결백한 사람이 아니면 위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돌을 쌓아 놓기만 하고 잘 간수하지 아니하면 돌을 가져다 팔아먹는 사람의 도둑질할 구멍을 터주는 결과가 됩니다. 어둔 밤을 틈타 이미 사들인 돌을 훔쳐내어 다른 곳에 팔아먹는다면, 마치 돌고 도는 물과 같아 그런 법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낮에는 패장이 자리를 뜨지 않고 딱 버티고 앉아 지키니 염려가 없겠지만, 밤에는 둘러 막아놓고 경비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조목을 상세하게 세워서 특별히 살피고 타이르기 바랍니다.'

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_3
팔달산 부석소의 흔적

라고 적어 돌 떠내는 업무의 특징을 잘 헤아렸는데,
 첫째는, 돌의 규격을 정하는 등 규정을 확실하게 세워서 일에 임하라는 지시를 담았다.
 둘째는, 감독자 겸 기술자인 패장을 엄히 다스려서 규정을 지키도록 하였다.
 셋째는, 캐낸 돌을 현장에 납품할 때의 합리적 관리 방법에 대해 거론하였다.
 넷째는, 납품한 돌을 되팔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지책도 아울러 세웠다.
 다섯째는, 돌을 떠내는 것과 납품에 관련한 일들이 일당제가 아닌 성과급 제도로 운영되었음을 알겠다.

이는 자칫 게으름에 빠져 소홀히 할 수 있는 인부들의 성취동기를 유발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근대적인 노동 방법의 도입으로 인해 화성 성역은 단기간에 완성된 것이다. 

또한 돌을 운반하여 현장에 당도한 다음 가공하면 효과적이지 못하므로 아예 부석소에서 가공하여 최소한의 돌덤만 붙인 채 현장에 납품하게 하였다. 그러면 현장에서는 가공을 최소화 하면서 일의 능률을 높이게 된다.

정조 20년(1796) 정월 24일, 정조는 현륭원에 모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에 참배하고 대유평을 지나 만석거에 이르러 화성에 쓰인 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면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孰知)'라 하였으니, 이른바 옛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오늘날 갑자기 셀 수 없이 단단한 돌을 내어 성 쌓는 용도로 됨으로써 '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하고 감탄한다. 
'익히 안다' 는 뜻의 '숙지'는 사실 '熟知'로 써야 맞다. 그러나 행궁의 노래당과 같이 소리 나는 대로 그 의미를 새기는 것도 당시의 한 여가 생활이었던 듯하다. 

현륭원을 수원에 조성하자 후궁 중에 한 사람이 태기가 있어 왕자를 그것도 어머니 생일에 낳았듯이, 화성을 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재인 돌의 산지가 공석면에 숙지산이라는 이름을 듣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왕조 국가에 있어 국가 통치에 이를 써 먹을 수 있으니 당시로서는 화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화성에 박힌 돌 하나에도 출신지가 서로 다르고, 다듬어 낸 석공의 땀과 운반한 노동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었으며, 우연한 지명에 감탄한 정조의 기쁨도 담겼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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