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수원향교 머리위에 일본신사를 짓다니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26
2010-02-10 13:55:12최종 업데이트 : 2010-02-10 13:55:1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향교는 무엇인가?

수원향교 머리위에 일본신사를 짓다니_1
수원향교 대성전-이용창 사진
 
향교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여러 군이나 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 유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것이 향학의 시초이다. 이때부터 지방재정에 의하여 운영되었으며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때부터 크게 장려되어 부․목․군․현에 각각 향교를 하나씩 설립하게 되고 학전(學田)으로 5~7결을 지급하여 재정운영을 돕는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이어서 대성전(大城殿)과 동서양무(東西兩廡)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양재(東西兩齋)의 구조를 갖춘다. 또 향교의 기능은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교육, 그리고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말기의 향교는 교육보다 제례적인 기능이 강화되어 교육에 다소 소홀해지기도 하였다.

질서를 중시한 향교 건축

향교의 건축에 있어서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전체에서 핵심공간이 되는데, 명륜당보다 대성전을 우위에 둔다. 이는 사학(私學)의 서원(書院)과 같다. 대개 자리 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에는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앉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경사지인 경우에는 높은 뒤쪽에 대성전을, 낮은 앞쪽에 명륜당을 앉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원칙을 지킨다. 건축으로 위계질서를 잡는 것이다.

수원향교 머리위에 일본신사를 짓다니_2
수원향교 내삼문-이용창 사진

수원 향교는 고려 충렬왕 17년(1291) 옛수원의 터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자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조 13년(1789)새수원을 건설할 때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에서 옮겨왔다는 것과 지금의 건릉자리가 옛 향교 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건릉자리에서 봉담면으로, 다시 지금의 자리인 수원시 교동으로 옮긴 것 같다.

'화성성역의궤'에,
 "기유년(1789)가을 향교를 새 수원부의 남쪽 3리쯤에 옮겨 세웠다. 힘은 달리고 일이 급하여 재목은 묵은 것을 많이 썼으며, 건물은 협소하고 뜰은 축축하였다. 을묘년 (1795)봄이 되자 마침내 뒷기둥이 썩어 물러나 이에 다시 지을 것을 장계에 올려 청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문선왕묘를 옮겨 모시고 옛 구조물을 모두 헐어내고 터를 넓게 닦았다. 2층 월대(月臺)를 높게 쌓고 하나같이 새 재목으로 하였다. 대성전(大城殿)을 상대(上臺)의 위쪽에 다시 세우니 북쪽에 앉아서 남쪽을 향하여 자리 잡았다." 고 기록되었다.
수원향교도 대지의 여건에 의해 전학후묘(前學後廟)방식으로 조성되었음을 알겠다. 

옮겨온 지 6년 만에 다시 지은 수원향교
 
을묘년 (1795)4월 24일 수원부 유수 조심태의 장계를 보면,
 "지금 본부의 판관 홍원섭(烘元燮)의 보고서 안에, '본부의 향교 터가 땅이 낮고 물이 차서 매번 섬돌과 주춧돌이 물에 잠깁니다. 때문에 대성전(大城殿) 북쪽 벽의 셋째기둥 하단이 한자 남짓이나 썩었고 중방(中防)의 나무도 그대로 흔들려서 어긋나고, 동쪽 건물의 북쪽 벽의 중방나무 1개와 서쪽 건물의 북쪽 벽 인방나무 1개가 모두 썩고 상했습니다. 이리하여 유생들이 그 목록을 적어 보고하므로 길일을 택하여 장계를 올리고 때가 되거든 고치려고 하였습니다.' 고 합니다. 당초 향교를 옮겨 모실 때 건물을 짓는 것이 너무 빨랐고 묵은 재목이 절반을 넘었을 뿐더러 또 터가 낮고 물이 많기 때문에 썩고 상하고 어긋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소중한 바를 헤아려보면 만 번이나 송구하고 민망스럽습니다. 고쳐짓는 것은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옮겨 모시는 길일을 오는 5월 초 6일 진시 (오전 8시경)로 가려 뽑아서 급히 아룁니다. 그러므로 향과 축문을 때에 맞추어서 가져가도록 하는 일을 해당 관청이 결재를 받아 처리하도록 서둘러 보고합니다."
옮겨온 지 6년 만에 다시 짓게 된 이유를 알게 한다.

수원향교의 모습

수원향교 머리위에 일본신사를 짓다니_3
석전대제-이용창 사진

수원향교는 홍살문을 지나 14보 쯤 들어가면 외삼문이 나오고 6~7보쯤 들어가 층을 높여 널찍한 대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명륜당을 가운데에 앉히고 동재와 서재를 벌여 세웠으며 동재 뒤편 동쪽 담 밖에는 전사청을 세웠다. 또 담장 안 동재 남쪽에 네모 연못하나를 팠다.

명륜당에서 여러 층계를 올라가면 신문(神門)(내삼문)이 나오고 신문 안에 대성전과 그 좌우에 동무와 서무를 두었다. 홍살문과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 순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면서 격을 달리하는 문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신성성을 고조시켜나간다.

을묘년(1795년 윤2월) 어머니 회갑연을 위해 수원에 온 정조는, 수원에서의 일정 가운데 향교 대성전 참배를 첫 번째로 한다. 물론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조가 참배했을 때 대성전은 위태로운 지경이었던 것 같다. 정조가 다녀간 뒤 두 달여 만에 수원부 유수 조심태가 장계를 올리니 말이다.

을묘 5월 초 6일 터를 닦기 시작해서 29일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상량까지 한다. 그리고 8월 초 6일 문선왕묘의 전(殿)과 무(廡) 이하 모든 곳의 공사를 마치고 8월 9일 문선왕묘(공자 위패)를 다시 모신다. 음력 8월 27일에 거행하는 추기 석전제 때문에 시기를 맞춘 것이다. 

수원 향교에는 중국의 5성(聖) 2현(賢)과 우리나라의 18현(賢)을 모시고 봄․가을 마다 제향을 올리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도 분향․헌작하여 성현들의 위덕을 추모한다. 도한 갑오경장 이후로 종전의 교육 기능은 중지되었지만 유림회관 및 유교대학과 어린이 유교학교를 여는 등 유학의 진흥을 위해 노력한다.

향교의 머리 위에 지은 일본신사

수원향교 머리위에 일본신사를 짓다니_4
공자상-이용창 사진
 
일제강점기 일제는 팔달산의 남쪽기슭, 지금의 수원시민회관과 중앙도서관 주변에 신사를 짓는다. 온 국토를 유린하고 식민지화 하였으니 그들의 신사를 짓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자리가 꼭 수원 향교 대성전의 머리 꼭대기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는가? 감정을 억누르려고 해도 앙금이 남는다.

수원에는 다른 지역보다 각급 학교가 많다. 교육도시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이의 출발이 다름 아닌 수원향교라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고리타분하게만 여겨지는 유학은 점점 그 설자리를 잃어간다. 이는 유학자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리라. 시대에 맞게 변화한 유학을 바라면서 그 폭넓은 교육을 기대해본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