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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농기구와 소들을 제공
[연재소설 제229회] 1800년, 華城 /월~금 연재
2010-08-17 14:39:07최종 업데이트 : 2010-08-17 14:39:07 작성자 :   e수원뉴스
수원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농기구와 소들을 제공_1
수원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농기구와 소들을 제공_1


  이와 더불어 정조는 화성의 백성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길도 제시했는데, 그것은 '만석거와 대유둔의 조성'이었다. 

  정조는 광교산에서 흘러나와 석벽 아래에서 휘돌아 남쪽의 읍치를 지나는 물이 휘도는 곳에 축대를 쌓고 수문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이는 성의 뒤쪽 황무지를 농토로 이용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 황무지에 물만 댈 수 있다면 백곡(15-20말) 정도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정조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더구나 황무지는 개인이 개발하기 힘들고, 국가에서 흉년 구제 사업이었다. 황무지 개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백성도 살리고 농토로 얻는 일거양득 효과가 얻을 것임을 정조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진목천(眞木川)을 막아서 큰 저수지를 만들라 명령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만석거(萬石渠)였다. 그리고 이렇게 개발된 황무지는 대유둔이었다. 

  정조는 대유둔의 땅 중 2/3는 장용외영 군인들에게 둔전으로 주고, 나머지는 수원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유둔은 둔도감 1명과 둔감관 1명 포함 모두 8명의 관원이 관리했는데. 농토를 받은 장용외영 군사들과 수원의 가난한 백성들은 모두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농기구와 소들을 나라로부터 제공받았다.

  더불어 생산물은 반은 경작가가 갖고 나머지 반은 수성고(修城庫)에 넣어 화성의 보수와 관리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대유둔에서 나온 비용만 가지고도 화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화성 축성에 있어 정조가 행한 또 하나의 특별한 결정은 화성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라는 명하였다. 이 기록에는 성역에 들어간 모든 물품은 물론, 일에 참여한 백성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도 포함시켰다. 또한 일꾼 사이의 높고 낮음을 없애 화성성역이라는 대역사의 참여의미를 높여주고자 하였다.   

  여기에 정조는 임금의 지불에 차등을 두었는데, 그것은 일당과 성과에 대한 적용을 다르게 하는 것이었다.
  정조의 이같이 결정은 일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였고, 책임감과 감동을 높여 주었다.

  화성 축조 기간은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10년을 기한으로 들어간 화성의 축성은 불과 3년 만에 완성되었다.
  "태야......."
  긴 화성에 대한 회상에 잠겨있던 현의가 이태를 불렀다. 이태가 대답했다.

  "예, 스승님."  "화성은....... 전하의 꿈이야......."
  이태라고 어찌 그것을 모를까, 이태의 가슴이 무너졌다. 그 임금님의 꿈이 이제 외로운 성으로 남았다.
  현의가 임금의 명을 받아 간 수원, 아니 화성으로 이름 바뀐 그곳은 경이로웠다.  

글/이기담

소설, 이기담,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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