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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마음 정한 곳은 수원의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이었다
[연재소설 218회] 1800년, 華城 /월~금 연재
2010-08-02 09:39:19최종 업데이트 : 2010-08-02 09:39:19 작성자 :   e수원뉴스
정조가 마음 정한 곳은 수원의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이었다_1
그림/김호영


 정조는 대신과 각신, 예조 당상과 종친부, 의빈부, 삼사의 2품 이상을 희정당으로 불러서 승지에게 그의 상소를 읽게 했다. 자형이 처남의 천장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니 노론들로서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심환지 또한 불길함을 떨칠 수 없었지만 반대할 수 없었다. 

  천장지에 대한 정조의 대안은 곧바로 나왔다. 정조는 풍수가들의 제안한 문의(文義)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운운하는 자리이지만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흠이어서 답답하게 막힌 기색을 면하지 못하였다. 또 지질과 물이며 용세(龍勢)도 결코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며 거절했다. 

  장단(長湍) 백학산(白鶴山) 아래의 세 곳도 "국세(局勢)가 혹은 협소하기도 하고 혹은 힘이 없고 느슨하기도 하다."며, 광릉(光陵) 좌우 산등성은 "달마동(達摩洞)으로서 문의의 자리와 함께 찬양되는 곳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곳은 바로 절터이니,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사(佛寺)의 뒤나 폐가(廢家) 또는 고묘(古廟)에 묘를 쓰는 것은 옛사람들이 꺼린 바이다"며 제외시켰다. 

  정조는 또 용인(龍仁)과 헌릉(獻陵) 안의 이수동(梨樹洞)과 후릉(厚陵) 안의 두 곳, 강릉(康陵) 백호(白虎), 가평(加平)의 여러 곳들도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곳도 없다고 거절했다. 

  이런 정조가 점지한 곳은 '수원'이었다. 정조는
  "수원의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 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 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고 하였다. 

  덧붙여 정조는 그곳을 "달무리처럼 둥그렇게 평탄한 곳이 바로 진정한 복룡 길지(福龍吉地)"라 덧붙였다.
  정조가 마음 정한 곳은 수원의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이었다. 곧 정조는 영의정 김익,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채제공, 관상감 제조 김종수, 선공감 제조 서유린, 예조 판서 이재간, 도감 제조 이재간·정민시·이문원 등을 그곳에 보내 살피도록 명했다. 곧 그들의 보고가 올라왔다. 

  "지사(地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극히 길하고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화산(花山)이 왼쪽으로 돌아 서북쪽(건방(乾方))으로 떨어져서 주봉(主峯)이 되고 서북쪽의 주산(主山)이 서북과 북쪽 사이(해방(亥方))으로 내려오다가 북쪽(계방(癸方))으로 돌고 다시 북동쪽(축방(丑方))으로 뻗어오다가 동북쪽(간방(艮方))으로 바뀌면서 입수(入首)합니다. 앞에 쌍봉(雙峯)이 있는데 두 봉우리 사이가 비었고, 안에 작은 언덕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구슬 같습니다".

  이어지는 길지에 대한 보고는 황홀할 만큼 좋았다. 

글/이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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