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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진검의 흰빛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연재소설 183회] 1800년, 華城 /월~금 연재
2010-06-14 10:13:34최종 업데이트 : 2010-06-14 10:13:34 작성자 :   e수원뉴스
달빛 아래 진검의 흰빛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_1
그림/김호영


 그날 밤이었다. 이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마음에 잠들지 못한 채 방문을 열고 나왔다. 흘끔 그의 시선이 주슬해가 잠들어있을 옆방을 보았다. 태의 그림자가 조심스레 요사채를 빠져나왔다. 천지사위는 조용했다. 바람마저 잠잠해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그에게 잠들지 못한 밤을 이기는 좋은 방법은 무예연습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생각의 소용돌이를 떨쳐내기에 좋은 것도 무예였다. 스승 현의처럼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하는 선은 고문에 가까웠고, 묘적산 뒤를 다람쥐처럼 헤집고 다니는 것도 깊은 밤에는 무리였다. 

  오늘 밤 보초는 새로 들어온 장용위 무사 둘이었다. 이태는 묘적사 종루에서 번을 서는 장용위 무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뒤 훈련장소로 쓰는 사찰 옆 공터로 나가 섰다. 이태는 들고 있는 진검을 칼집에서 꺼내들었다. 반달의 희미한 달빛 아래서도 진검의 흰 날빛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어느새 이태의 마음과 몸은 경건해졌다.

  이태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쪽 어깨에 대고 섰다. 조선의 검법, 본국검(本國劍)의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였다. 

  본국검은 이태가 가장 좋아하는 검보였다.
  처음 이태가 지리산에서 현의에게 배울 때, 이 검법은 '본국검'이라 이름을 붙여 배우지 않았다. 묘적사로 들어오고, 임금의 명을 받아 백동수와 함께 무예18기를 정립해나가면서 이태는 그것이 '본국검법'이라 불리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드러난 본국검의 연원이 신라의 화랑인  황창랑(黃倡郞)의 기록에 기원한다는 것도, 그 내용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성종임금 때 간행된 지리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신라 사람 황창랑은 나이 겨우 15~6세에 백제에 들어가 저잣거리에서 칼춤을 추었다. 칼을 어찌나 잘 노는지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만들 만큼 많았다. 백제왕이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백제왕은 그를 불러 왕 앞에서 칼춤을 추도록 하였다. 창랑이 칼춤을 추다 틈을 노려 왕을 찔렀다. 창랑은 백제에 잡혀 죽임을 당했다. 신라인들이 창랑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얼굴 모양으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다.......'

  왼쪽 어깨에 칼을 기댄 채 이태는 눈을 감고 먼 옛날 황창랑이 놀던 칼춤을 그려보았다. 앳되고 앳된 어린 소년의 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이태의 몸이 황창랑의 모습인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태의 몸이 우측 쪽으로 한 번 돌아 우측 발을 들어 안으로 스치며 (우내략/右內掠)칼을 머리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진전격적세(進前擊賊勢)를 취하더니 곧 몸을 뒤로 돌려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를 취했다.

글/이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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