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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54회] 1800년, 화성(華城)
글/이기담 (월~금 연재)
2009-12-15 09:45:39최종 업데이트 : 2009-12-15 09:45:39 작성자 :   e수원뉴스

"피야. 피가 분명해"사내의 먹빛 옷은 짙은 얼룩들로...


[연재소설 54회] 1800년, 화성(華城)_1
그림/김호영

그 시간, 인왕산이 올려다 보이는 길목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사내는 갈대 줄기를 잘라 건조시켜 만든 갈삿갓을 깊이 눌러써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통이 좁은 저고리와 바지는 검은색이었다. 

  사내가 들어선 골목은 경복궁을 동쪽에 두고 인왕산 아래 자리한 곳이었다. 사내는 산 아래 의통방(義通坊) 쪽이 아니라 창의문에 닿아있는 백운동(白雲洞) 쪽에서 나타났다. 사내의 걸음이 너른 마당과 높은 솟을 대문으로 이어진 기와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골목들을 지나쳐 인왕산 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곳은 이른바, 조선의 지체 높은 양반들만이 모여 산다는 북촌(北村) 중에서도 순화방(順化坊)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삼아 나라를 건국한 이래, 한양에는 크게 세 가지의 주거지 구별이 생겨났는데, 이른바 북촌과 남촌, 그리고 중촌이 그것이었다. 물론 나라에서는 오서(五署)라는 다섯 개의 방위로 구분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통용된 것은 이 세 가지 구분법이었다. 

  북촌은 청계전을 경계로 북쪽지역, 그러니까 인왕산 남쪽 아래지역을 통틀어 붙였고, 이곳에는 주로 벼슬아치를 포함해 지체 높은 양반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에 반해 청계천 남쪽, 남산 아래에 만들어진 주거지를 통틀어 남촌(南村)이라 불렀는데, 이곳에는 양반들이나 하급 관리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이곳에 사는 양반들은 비록 신분은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권문세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미관말직의 신분이거나 관리가 되기를 오매불망 바라며 과거를 준비하는 이들이었다. 

  이들 양반보다 신분적으로 아래인 중인들이 산 곳을 사람들은 중촌(中村)이라 불렀다. 중촌이 자리한 곳은 청계천을 사이 둔 양쪽, 서울의 중앙부였다. 중인들은 대개 기술관이나 잡직에 종사하던 특수 신분 계층을 구분해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내가 걷는 순화방이란 곳은 서울의 양택지 중에서 가장 풍수지리상 좋은 곳 중 한 곳인 셈이었다. 북촌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 겨울에는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되었다. 어디 이뿐이랴, 남쪽은 넓게 트여 한양의 안산(案山)인 남산 또한 품안에 들듯 시야에 들어왔다. 좋은 곳에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모이는 것은 인지상정,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북촌에는 주로 영조 이전부터 조선의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노론들이 주로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심환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내처 인왕산 쪽을 향해 걷던 사내의 걸음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피야. 피가 분명해."
  사내의 귀에 방금 사내를 스쳐 지났던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잖아도 평범하지 않은 사내의 먹빛 옷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사내의 먹빛 옷은 뭉개진 듯한 짙은 얼룩들로 군데군데 뻣뻣했다. 눈 밝은 남자 하나가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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