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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25회] 1800년, 화성(華城)
글/이기담(월~금 연재)
2009-11-04 10:37:54최종 업데이트 : 2009-11-04 10:37:54 작성자 :   e수원뉴스

이제 모든 정책들은 발을 내린 채 왕 뒤에 앉은 대비의 손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연재소설 25회] 1800년, 화성(華城)_1
그림/김호영

 정조는 언제나 두 사람만의 비밀서찰임을 강조하며 어찰을 받은 즉시 불에 태우라 명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장의 어찰도 불에 태우지 않았다.

  어느새 저만치 심환지의 눈앞에 수정전의 담장이 보였다.
  수정전, 그곳은 대비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경훈각(景薰閣) 서북쪽에 자리잡은 수정전은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은 은밀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좁거나 답답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나무들에 둘러싸인 수정전은 한적하지만 넓었고, 창덕궁 후원으로 연결된 주변은 아름다웠다. 
효종이 재위 5년(1654)에 인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양모였던 장렬왕후를 위해 지었고, 그때 이름은 수정당이었다. 

  창경궁 영춘헌에서 창덕궁 수정전으로 이르는 궐의 수비는 대비의 명을 받아 군사들이 바뀌어져 있었다.
  수정전 정문인 영훈문(迎薰門)을 앞에서 심환지는 멈춰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둠 속에 번을 선 숙위군사들이 목석처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영훈문 안 수성전은 보이지 않았다. 심환지는 영훈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마당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 판장(板墻)이 대비에게로 가는 길고 먼 길을 상징하는 것처럼, 대비전으로 가는 신료들의 어렵고 힘든 길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흐흠!"
  그는 판장 안쪽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헛기침 소리를 냈다. 곧 안쪽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오시었습니까?"
  조족등(照足燈)이 사내의 발밑을 밝히고 있었다.
  "승지 아니신가?"
  그는 전에 승지를 역임했던 윤행임이었다. 심환지가 그를 알아보았다.
  "좀 전에 도승지가 되셨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윤행임의 뒤를 따라 나타난 사람은 이시수였다. 
  "도승지라니?"
  "대비께서 언서로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하고 빈렴(殯殮)에 참가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내일 있을 정조대왕의 시신을 염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요?"
  '과연 대비시로다!'
  심환지의 마음에 절로 감탄이 일었다. 대비는 정조가 위험에 처한 그 순간부터 이미 왕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이미 유명을 반포하고 이제 열한 살의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수렴청정을 맡게 되는 대비 정순왕후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정책들은 발을 내린 채 왕 뒤에 앉은 대비의 손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 대비의 세상이자, 노론 벽파의 세상이었다.
  심환지가 그들의 안내를 받아 수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좌의정."
  심환지가 대비에게 예를 갖추었다. 문득 가슴에 벅찬 감정이 북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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