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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이 맺어준 두 할머니의 피보다 진한 우정
독립투사의 아내와 딸로 만나 해방 후 친자매처럼 지내
수십년 만에 복지시설서 재회…"한 방에서 여생 함께할 것"
2017-08-14 12:10:00최종 업데이트 : 2017-08-14 12:10:00 작성자 :   연합뉴스
김봉춘(76·왼쪽) 할머니와 손효숙(82) 할머니.

김봉춘(76·왼쪽) 할머니와 손효숙(82) 할머니.

독립운동이 맺어준 두 할머니의 피보다 진한 우정
독립투사의 아내와 딸로 만나 해방 후 친자매처럼 지내
수십년 만에 복지시설서 재회…"한 방에서 여생 함께할 것"

(수원=연합뉴스) 권준우 기자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투사를 남편과 부모로 둔 인연으로 만나 동고동락하던 두 소녀가 수십년 간 소식이 끊겼다가 광복 72주년인 올해 노년의 할머니가 돼 경기 수원의 복지시설에서 극적으로 재회한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지난 6월 중순 경기도 수원시 소재 보훈시설인 보훈원.
건물 복도에서 할머니 두 분이 서로 부둥켜안고 "그동안 어찌 지냈소"라고 물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이들은 독립투사 최문식(1914년생·건국훈장 애국장 수상) 선생의 아내 손효숙(82) 할머니, 그리고 부부 독립운동가 김영준(1900년생·건국훈장 애족장 수상)·장경숙(1904년생·건국훈장 애족장 수상) 선생의 딸 김봉춘(76) 할머니다.


두 할머니의 인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 할머니의 남편인 최문식 선생은 1930년대 서울 광화문에서 "뜻 있는 자는 임시정부로 오라"는 벽보를 보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최문식 선생은 먼저 상하이 임시정부로 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김영준 선생 내외를 동지로 만났다.
이 세 명의 투사는 이때부터 10여 년간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스파이 활동을 하고, 독립군의 피복을 바느질하는 허드렛일까지 가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최문식 선생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총상으로 오른쪽 뺨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기도 했다.
상하이 소재 일본군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최문식 선생은 광복을 맞아 자유의 몸이 됐고, 귀국 후 1950년 6·25 전쟁 직전 15살이던 손 할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은 무려 21살의 나이 차가 났지만, 나라를 위해 한 몸 던진 그의 애국심에서 듬직함이 느껴졌다고 손 할머니는 회고했다.
광복 직후 귀국한 김영준 선생 내외는 상하이에서 낳은 딸인 김 할머니와 서울 청파동 독립군 임시거처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다른 동지들을 수소문한 끝에 서울 인근 사글셋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던 최문식 선생과 재회했다.
최문식 선생은 충청도 유지였던 집안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몰락하는 바람에 독립운동 전 배운 이발기술로 손 할머니와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손 할머니는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는 독립운동했다고 해도 나라에서 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한 끼 걸러 한 끼 먹는 생활이었다. 비좁은 사글셋방에 이불 한 채 놓고 살았는데 임시로 지어놓은 허름한 집이라 비만 오면 방바닥에 물이 흥건해졌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김영준 선생 내외는 최문식 선생과 손 할머니가 청파동 거처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왔다.
일제강점기 동지로서 만난 이들은 그렇게 이웃이 됐고, 6살 터울의 손 할머니와 김 할머니의 우정도 이때 싹텄다.
결혼한 몸이라지만 방년의 나이였던 손 할머니와 10대 초반 앳된 나이의 김 할머니는 금세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산파 일을 따라다니고, 김장 품앗이나 삯바느질까지 닥치는 대로 하는 중에도 서로를 의지했다.
김 할머니는 "어린 소녀가 혼자 견디기엔 어려운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먹고사는 문제로 늘 바빴고, 제겐 언니가 부모이자 자매이자 친구였다. 힘들 때마다 서로가 곁에 있어 줘서 꺾이지 않고 잘 이겨냈다"라고 회고했다.
두 할머니의 한 지붕 생활은 10여 년간 이어지다 막을 내렸다.
3공화국 시절 미미하게나마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 지원이 시작되면서 손 할머니 내외가 경기도 성남시의 10평 남짓한 유공자 주택을 분양받아 두 딸과 함께 청파동 거처를 떠난 것. 이후 김 할머니도 결혼해 독립생활을 했다.
떨어지더라도 편지라도 주고받자는 마음이었지만, 두 할머니 모두 이사를 거듭하면서 소식이 끊겼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손 할머니는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홀로 생활하다 의탁할 곳을 찾아 2011년 10월 보훈원에 입소했다.
그러던 지난 6월 14일 무료하게 보훈원 1층 복도에 앉아 있던 손 할머니의 눈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비쳤다. 바로 김 할머니였다.
부양 의무자인 아들의 이민으로 지낼 곳이 없어진 김 할머니가 보훈원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앞뒤 사정을 들은 보훈원 측은 두 할머니를 한 방에 배정했다.
피보다 진한 우정으로 맺어져 친자매나 다름없다는 두 할머니는 여생을 이곳에서 함께 할 생각이다.
김 할머니는 "언니가 어려웠을 때 저희 부모님이 도움을 줬는데 이젠 거꾸로 언니가 복지타운 사람들도 소개해주고 적응도 도와주면서 생활을 보살펴 주고 있다"라며 "어려운 때 동반자가 돼 준 언니와 여생을 함께 보낼 수 있어 이곳이 천국 같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손 할머니는 "정말 어렵고 치열한 삶이었다. 한 끼 걸러 한 끼 먹던 시절에 동생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긴 시간 떨어져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니 정말 필연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세상 떠날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살고 싶다"고 화답했다.
stop@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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