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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세월 더께 묻어나는 성주 한개마을
2018-01-10 08:01:01최종 업데이트 : 2018-01-10 08:01:01 작성자 :   연합뉴스

(성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한 한개마을(중요민속자료 제255호)은 예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 중 하나로 손꼽혔다. 마을 입지의 생김새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크고 작은 고택들이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前低後高)로 배치돼 있다.
소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영취산(靈鷲山·332m)의 줄기가 마을을 보듬어 안은 좌청룡·우백호의 지세를 갖췄다.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백천(白川)과 서쪽에서 흘러드는 이천(伊川)은 마을 어귀에서 합수해 동남쪽으로 흘러간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 백천에 있었던 한개나루에서 유래했는데 '한'은 크다,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로 '큰 나루터'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명당지세에 따른 발복 때문인지 이 마을에서는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조선 시대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가 배출됐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 호위 무관으로 평생 절의를 지킨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1713∼1773), 조선 말기 한성판윤과 공조판서를 역임하며 당대의 최고 선비로 이름을 드높였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성리학의 이론가로서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가 대표적이다.
유서 깊은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 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해 개척한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집성마을이다. 6채의 재실을 포함한 75채의 집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졌는데 오랜 세월에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마을 곳곳에는 퇴락한 가옥을 복원하고 정비해 옛 모습을 살리려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곽차순 문화관광해설사는 "전저후고의 모양을 하고 있어 어느 집에서나 햇빛이 잘 들고 집집마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가 대지 특성에 따라 짜임새 있게 배치돼 있다"면서 "어느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도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는 정겨운 농촌 마을이지만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는 안채에 들어가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 역사가 숨 쉬는 옛 건물의 아름다움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서 마을 길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가면 제일 먼저 진사댁(도 민속문화재 제124호)이 나온다. 정조 22년(1798)에 지은 집으로 안채는 기와집, 사랑채와 새사랑채는 초가다. 눈여겨볼 것은 새사랑채로 건물의 구조가 조금은 독특하다. 여성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 사이에 배치한 것도 특이하지만 마루와 방, 창고가 각각 1칸씩 총 3칸으로 'ㄱ' 자 형태로 지어진 것이 눈길을 끈다. 누마루는 계자난간으로, 문살은 '卍'자 장식으로 한껏 멋을 냈다. 방의 한 벽면에 크고 작은 수납장을 세 개나 만든 것도 이색적이다.
민박이 가능한 진사댁을 나와 삼거리에서 왼쪽 마을 길로 접어들면 대문 앞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있는 교리댁
[연합이매진] 세월 더께 묻어나는 성주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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