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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귀신이 된 감악산
2018-01-13 11:00:00최종 업데이트 : 2018-01-13 11:00:00 작성자 :   연합뉴스
남북 교통·군사 요충지·산 정상엔 글자 없는 '진흥왕순수비'
(파주=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조선에서 이름난 산으로) 동쪽엔 치악산이요, 남쪽으로는 계룡산과 죽령산과 우불산과 주흘산과 금성산이며, 중부엔 목멱산(지금의 서울 남산)이며, 서쪽으로는 오관산과 우이산이고, 북쪽으로는 감악산(紺嶽山)과 의관령이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지금의 경기 파주 적성면에 있는 감악산은 조선 시대에 신성시된 산악 중 한 곳이었음을 엿보게 된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듬해인 태조 2년(1393) 1월 21일에 감악산을 지키는 성황신을 호국백(護國伯)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감악산은 철마다, 혹은 가뭄과 같은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 제물을 받는 신으로 당당히 대접받았다.
감악산은 해발 675m 높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영험한 곳으로 내내 꼽힌다.
예로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해서 감악(紺岳)이란 이름을 얻었다. 산 전체가 거대한 돌덩이라 신성성이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보호시설로 묶여서 일반에 개방된 지는 오래되지 않는다.
◇ 남과 북 교통·군사 요충
감악산은 예로부터 임진강을 낀 남과 북의 교통 요충지이자 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 지배권을 다투던 군사 요충지였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서쪽은 파주시 적성면, 북동쪽은 연천군 전곡읍, 남동쪽은 양주시 남면 등 3곳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국경 분쟁이 심하던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영토 싸움의 현장이었다.
감악산에서 북서쪽 방면으로 임진강을 향해 조금만 달리면 중성산이란 야트막한 산이 나타난다. 해발 150여m도 채 안 되는 그곳에 쟁투 현장의 한복판을 차지하는 고대 성곽 칠중성(七重城)이 있다. 군사 전략상 얼마나 중요했으면 성벽을 일곱 겹으로 쌓았겠는가.
고구려 영류왕 12년, 신라 진평왕 51년(629) 8월에 벌어진 양국 전쟁에서 김유신이 혁혁한 공을 세워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낭비성(娘臂城)이 바로 이 칠중성이라는 학계 견해가 많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감악산신의 감호를 받고는 출세 가도를 달린 셈이다.
감악산은 험준해 산성을 쌓기 곤란했다. 대신 인접 지점이자 임진강 도강의 길목이 되는 중성산에다가 군사요새를 건설한 것이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군의 글로스터시(市) 출신 부대원들이 처절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글로스터 연대 1대대와 왕립 제170 박격포대 C소대 용사들은 설마리 235고지에서 수도 서울을 함락하기 위해 진격해 오는 중공군 주력 63군 3개 사단을 맞았다.
사흘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공세를 차단했고, 그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전설
산 정상에는 삼국시대 고비(古碑)가 있다. 높이 170㎝인 이 비석은 일명 '빗돌 대왕비' 또는 '설인귀비'라고도 한다.
그런데 비석엔 글자가 없다. 애초에 없었는지, 아니면 차츰 마모돼 없어
[쉿! 우리동네]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귀신이 된 감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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