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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열두 봉우리마다 기암절벽 품은 청량산
2017-09-12 08:01:01최종 업데이트 : 2017-09-12 08:01:01 작성자 :   연합뉴스

(봉화=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백두대간 큰 산줄기에서 살짝 비껴 있는 청량산(淸凉山ㆍ871.7m)은 그리 높지도 않고 전체 둘레도 40㎞ 남짓하지만 육육봉(六六峯)으로 불리는 12개의 봉우리마다 기암절벽을 품고 있어 빼어난 자태를 뽐낸다. 이름 그대로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청량산은 예부터 당대의 학자와 시인 묵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금강산과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유산기(遊山記)를 낳았다. 소수서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한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ㆍ1495∼1554)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을 쓴 이래 조선 선비들은 청량산을 소재로 100편이 넘은 기행문과 1천여 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주세붕은 "북쪽에 묘향산, 서쪽에 구월산, 동쪽에 금강산, 중앙에 삼각산, 가장 크고 남쪽에 있는 산이 두류산(지리산)이다. 그러나 작으면서도 신선이 살만한 산은 청량산"이라고 말했다. 학자 오두인(1624∼1689)은 유람기 '청량산기'에서 "강을 건너 위로 올라 산길을 회전하니 별계의 동천(洞天)이 있었다. 바위산이 천길 수직으로 솟아 칼과 창을 둘러놓은 것 같고, 호랑이와 용이 걸터앉은 모습이었다. 수많은 바위가 한 빛깔의 돌이고, 붉은 벼랑 푸른 절벽 맑고 초절한 경계가 진실로 나그네의 수심을 씻을만했다"라고 묘사했다.
퇴적암으로 형성된 청량산은 고대 이후로 '수산'(水山)으로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청량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주세붕은 불교식 이름이던 봉우리 이름을 유교식으로 바꿨다. 청량산 내 암자에서 글을 읽었던 퇴계 이황(李滉ㆍ1501∼1570)은 아예 청량산을 불가에 대비되는 '유가의 산'이라는 뜻에서 '오가산'(吾家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1982년 도립공원으로, 2007년에는 명승 제23호로 지정된 경북 봉화의 청량산은 경북 청송의 주왕산, 전남 영암의 월출산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기악(奇嶽)'으로 꼽힌다. 청량산 트레킹은 짧게는 1시간, 길게는 9시간까지 다양한 코스를 선정할 수 있다. 최장 코스(12.7㎞)는 안내소를 출발해 축융봉∼오마도터널∼경일봉∼자소봉∼하늘다리∼장인봉∼금강대를 거쳐 안내소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로 꼬박 9시간이 소요된다. 입석에서 청량사로 올라갔다가 선학정으로 내려오는 최단 코스(2.3㎞)는 1시간 정도다.
입석에서 출발해 응진전∼김생굴∼자소봉∼연적봉∼뒷실고개∼하늘다리∼장인봉∼하늘다리∼뒷실고개∼청량사를 거쳐 입석으로 다시 하산하는 코스를 걸어 봤다. 느긋한 걸음으로 6시간 정도 걸린다. 이 코스의 장점은 청량산의 빼어난 절경과 하늘다리, 불교와 유교 유적을 두루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길 또한 경사가 완만하고 험하지 않다.
◇ 명승으로 지정된 '대한민국 3대 기악(奇嶽)'
청량산 트레킹은 도로변의 커다란 선돌인 '입석'을 들머리로 삼는다. 청량산도립공원 입구인 청량산 삼거리에서 청량교를 지나 도립공원으로 진입한 뒤 청량폭포
[연합이매진] 열두 봉우리마다 기암절벽 품은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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