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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안동 병산서원,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2017-03-07 08:01:00최종 업데이트 : 2017-03-07 08:01:00 작성자 :   연합뉴스

(안동=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조선 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인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지방의 사림이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으로 지성과 교양의 요람이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째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병산서원의 전신은 안동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원이다.
선조 5년(1572) 서애가 현재의 장소로 옮겼는데, 이때 서애는 그 이유로 "읍내 도로변은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 광해군 6년(1614) 유림들이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祀)를 지으면서 서원으로 위상이 변모했고,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곳 가운데 하나다.
서애 류성룡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제자다. 퇴계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서애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오른 서애는 대동법 모태인 작미법(作米法)을 실시했고,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으며,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주고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었다. 또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해 후원했다.
변덕이 심하고 이중인격자로 알려진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려고 하자 서애는 "임금의 수레가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며 강력하게 제지하면서 국란 타개책을 세웠다. 설득과 통합의 리더였던 서애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장석길 문화관광해설사는 "병산서원은 완만한 화산을 등지고 앞의 낙동강과 절벽 병산 사이에 자리해 강학과 수양에 좋은 곳"이라며 "절묘한 경치뿐만 아니라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뛰어난 건축물로도 유명하다"고 말한다.
◇ 만대루 아름다움, 건물 위용보다는 자연스러움에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불리는 병산서원은 가는 길도 아름답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흙길을 4km 정도 가면 서원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구비길 너머 또 구비길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낙동강도 굽이 흐른다. 풍광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산비탈에 가지런하게 세워진 건축물이 나타나고, 서원은 첫눈에도 아름답고 위엄 있다. 갓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같은 화산을 등지고 있는 병산서원은 절벽같이 펼쳐진 병산과 모래밭을 감고 흐르는 낙동강과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아늑하고 평화롭다. 공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은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말이다. 솟을삼문 앞에 서면 시선이 만대루를 거쳐 입교당까지 연결된다. 축선을 이용한 장점 중 하나로 공간의 연속성과 흐름이 확연히 드러난다. 장석길 문화관광해설사는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옮겼다

[연합이매진] 안동 병산서원,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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