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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교수, 화성행궁이 뭐예요? '화성궁'이지!
정조의 꿈과 화성, 도올 김용옥 선생 강연이 열려
2013-05-03 18:37:23최종 업데이트 : 2013-05-03 18:37:23 작성자 : 시민기자   김소라

2일 오후 4시가 안된 시각 청소년 문화센터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만원이다. 오늘 무슨 큰 행사라도 열리는 걸까?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몇 번을 돌다가 결국 뒤차를 막은 채 주차하고 청소년 문화센터 대공연장으로 들어섰다. 

1층, 2층 자리가 만원이다. 거기다가 무대 뒤 의자까지 마련하여 사람들이 더 이상 들어설 곳이 없이 꽉꽉 들어 찼다. 수원시에서 웬만한 강연을 하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과연 어떤 유명인이 오시길래... 바로 도올 김용옥 선생의 수원 화성과 정조의 리더십에 대한 강연이다. 

"인문학 도시 수원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수원과 오산, 화성의 상생 발전을 위하여 김용옥 선생님이 정조의 리더십에 대한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김용옥교수, 화성행궁이 뭐예요? '화성궁'이지!_1
수원 포토뱅크 / 염태영 시장과 함께

염태영 수원시장의 소개로 도올 김용옥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번 강연에서는 정조의 리더십과 애민정신을 이야기했으며, 지금 이 시대의 의제가 무엇이지를 담론으로 풀어내었다. 서양 문화가 범접할 수 없는 문화의 힘 그리고 전 세계 인류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에 대한 스토리가 핵심이었다

"역사는 거울이다! 거울은 문제가 있는 것을 들여다보라는 의미를 담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는 이유다. 정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오호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고 왕으로 등극한 첫날 당당히 밝힌다. 역적, 범죄자의 아들이라고 명실공히 선언하는 셈이다. 
하지만 정조는 거짓이 아닌 진정성이 정치에 있어서 혹은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유일 무이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당대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혁시켜버렸다." 

"그리고 나서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전하는 계획을 세운다. 지금의 융건릉 자리가 원래 수원 자리였고, 화성이라는 이름은 '곶산'이라는 지명에서 왔다. 곶이 '꽃'으로 불러지고, 다시 '꽃 화' 자를 사용하여 '화산'이 되었다.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는 일에서부터 모든 계획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사실 수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정조의 완벽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화성 설립의 목적이었다." 

김용옥교수, 화성행궁이 뭐예요? '화성궁'이지!_2
수원시 포토뱅크/ 정조의 꿈과 화성 강의
 
또한 도올은 지금 수원사람이 잊고 있는 자랑스러움을 일깨워주는 말을 이어나갔다. 

"화성행궁에 대한 명칭의 문제다. 당대 행궁이라 함은 왕이 잠시 머무르는 곳, 선대 왕의 참배를 드리기 위해 떠날 때 이용했던 임시 숙소 개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화성행궁은 그냥 머무르는 공간으로써가 아니었다. 경복궁처럼 왕이 머무르는 곳, '궁'의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건설했다. 그렇다면 '화성행궁'이라는 명칭 대신 적어도 수원사람들 만큼은 '화성궁'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지금껏 화성행궁에 대해서 생각해 온 개념을 뛰어넘어 신선하게 다가왔다. 역사적 사건 혹은 건축물에 대해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과 연결지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조의 뛰어난 리더십, 위대한 세계관은 화성행궁의 위치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 당시 풍수지리에 의하면 왕이 거하는 궁궐은 모두 남면을 했다. 북쪽이 왕이 있는 곳이라 여겨서 모든 궁은 남쪽을 바라보고, 북을 뒤로 등지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화성행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팔달산이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동면'의 모습이다. 이러한 건축물의 방위는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일이다. 아무도 감히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엎을 수 없었던 일이다." 

"왜 이렇게 정조는 화성행궁을 동면하도록 지었을까? 바로 '물자의 소통' 때문이다. 궁궐을 동면으로 하니 옛 1번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가는 형상이 되면서 물류의 소통이 매우 원활해지게 되었다. 
궁의 위치를 서쪽으로 배치하여 남북동선이 이루어지니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길이 나게 된다. 이것은 사실 수원 화성의 제1의 특징이다. 절대 정조는 전통적 유교관념에만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새로운 도시에 맞는 새로운 사상, 개혁적인 마인드가 있는 왕이었다는 것이다." 

"혹시 화성이 얼마 만에 지어진 줄 아는가? 2년 9개월이라고 한다. 중간에 폭염 때문에 5-6개월을 쉬었던 시기를 계산하면 거의 2년 만에 축성한 것이다. 지금 아마도 현대, 삼성, 엘지 등 굴지의 건설회사들이 모두 달려들어 건축을 한다고 해도 과거의 화성을 재현하지 못할 거라고 한다. 

견고하고 튼튼하며 예술적이다. 정조 시대의 위대성은 바로 이 점이다. 모든 일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는 철저한 성과급제로 화성을 지었다. 돈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책임제, 도급제를 당시 도입하여 공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다. 당파를 불문하고 완벽히 서로 백성이 합심하여 이루어낸 최고의 건축물이다. 정조의 이상과 꿈을 이루어낸 것을 뛰어넘어 전무후무한 인류 역사의 위대성이 바로 화성이다." 

김용옥교수, 화성행궁이 뭐예요? '화성궁'이지!_3
수원 포토뱅크 /강연에 열중하는 사람들

철학자 김용옥선생의 강의를 통해서 수원 화성에 담긴 정조의 세계관을 더 깊이 알게 됐다. 일상성에 묻혀 위대성이 느껴지지 않았던 화성. 이제는 조금 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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