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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
남한산성의 노래
2013-05-01 02:35:30최종 업데이트 : 2013-05-01 02:35:30 작성자 : 시민기자   문예진
오래전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며 임금과 조정대신들의 행태에 한심하고 치욕스럽고 분통터지던 기억과 함께 칼바람 매섭던 한겨울 젖은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동상으로 감각도 없는 발을 끌며 창하나 의지하여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가슴아픈 모습들이 꽤 오랜시간 날 힘들게 했다.  

드라이브 코스만 몇번 지나가본 남한산성을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를 더듬으며 한번 가보고자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로서는 가는길이 꽤 복잡한터라 그동안 미루고만 있다가 이번에는 꼭 가보리라 작정하고 마천역에서 남한산성 서문쪽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평일임에도 벌써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로 입구가 북적인다.  완전무장한 등산객들 사이로 선글라스 하나 끼고 운동화 차림으로 열심히 산을 오른다.  등산로에는 이제는 시들어가는 진달래가 지천이다.며칠만 일찍 왔더라면 활짝핀 진달래꽃밭을 만났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그래도 아직은 고운 분홍빛깔과 싱그러운 숲의 냄새가 참으로 상쾌하다.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1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1

가벼운 산책로 수준이 아닌 꽤 가파른 등산로를 한시간 남짓 오르니 드디어 성곽이 보인다  운동화에 청바지차림의 나를보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대단하다고 한마디 하신다.  드라이브코스만 기억하던 내가 이 산을 너무 얕잡아 본걸 책망하는것 같아 부끄러웠다. 산성에 올라 내려다보니 시가지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앉아 준비해온 김밥과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고른후 본격적인 남한산성 탐방을 시작한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피난와서 머물던곳으로만 알고있던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때는 신라문무왕이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다보면 조선땅에서 조선이 임금과 조정대신들이 남한산성에 고립돼 식량난까지 겪으며 청나라군대에 포위당한듯한 느낌이 들어 분통이 터졌는데 산성에 올라보니 인조가 왜 이곳을 택했는지 알수 있을것같다.  
산성까지 오르는길은 경사가 심해서 적들이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고 성위에서 내려다보면 산을 오르는 적들의 모습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성을 방어하는데 더없이 좋은 지형인것이다.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2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2

비밀통로였던 제5암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서니 올라오던길과는 전혀 다르게 완만하고 편평한길이 펼쳐진다.  성을 따라 걷다보니 수어장대가 보인다.  
수어장대는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곳에 지은 건축물로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5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수어장대의 오른편에는 무망루라는 문루가 있는데 병자호란때 겪은 인조의 시련과 8년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후 북벌을 꾀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3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3

중간중간  세워져있는 이정표에는 행궁이 나와있질않아 여러사람에게 물어보며 산길을 걷다보니 산아래 행궁이 보이는데 생각보다는 작은규모다.  
행궁입구에 입장료 2천원이라고 쓰여있어 볼것도 없을것같은데 무슨 입장료를 받나 생각하며 기웃거리는데 행궁안쪽에 이제 막 해설이 시작된듯 몇명의 관람객과 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얼른 2천원을 내미니 저아래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와야 한다는것이 아닌가.  아래쪽에 매표소가 있는데 산위에서 내려온 나는 바로 행궁으로 들어온 것이다.  빨리 해설을 들어야겠기에 검표아저씨께 사정을 하고 표대신 2천원을 넣고 뛰어가서 귀를 쫑긋 세운다.

행궁이란, 왕이 궁을떠나 도성밖으로 행차하는경우 임시로 거처하는곳을 말하는데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4년에 건립되었다가 인조14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47일간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청에 항전한다.  

정문인 한남루를 들어서면, 왕이 잠을 자던 침전으로 상궐에 위치한 내행전과 공식적인 업무를 보던 곳으로 하궐에 위치한 외행전이 있다.  외행전 앞마당 오른쪽편에 행궁건물과는 어울리지않는 비닐하우스 같은 지붕하나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니 행궁복원 사업때 발굴된 신라유적지로서 나당전쟁중 신라 문무왕이 건설한 병참창고가 있던자리라고 한다. 행궁과 신라유적지를 동시에 복원할수 없어 행궁만 복원을하고 이곳은 신라유적지터 였다는것만 알수있도록 하고 발굴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4
남한산성을 봄바람과 함께 다시 만나다_4

행궁안에서는 행궁과 남한산성의 옛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외국인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으로, 일제때 소멸된 행궁울 이 사진이 없었다면 복원하지 못했을거라고 하니 기록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깨달았다. 
사진중에는 산성아래의 민가마을이 보이는데 정조가  병자호란의 아픔을 잊지말자는 의미로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면서 군역과 세금을 면제해주어 한창때는 5천명 정도의 백성이 살았다고 한다.  

남한산성을 둘러보면서 꽤 여러곳에 정조의 흔적들이 보였는데 화성행궁뿐 아니라 이곳 남한산성도 정조가 관심을 많이 쏟았던 곳임을 알았다.  그동안 치욕의 병자호란으로만 기억되던 남한산성을 이제는 아프지만, 그래도 그 아픔을 이기고 강대한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리라 기대해본다.

남한산성,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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