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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초상
2013-04-25 21:09:53최종 업데이트 : 2013-04-25 21:09:53 작성자 : 시민기자   심춘자

비가 오는 날이면 투명 우산 쓰고 어디든 쏘다니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라는 곳, 오라는 사람 없어도 왠지 좋을 일이 있을 것 같은 설렘으로 하루를 맞는다. 기쁜 소식으로 전화기 벨소리가 요란할 것으로 확신했으나 날이 저물도록 휴대폰은 비싼 시계 역할 밖에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휴대폰만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잠깐 그런 생각했을 뿐 해가 들락날락하는 동안 온종일 집안에서 나름 바쁘게 지낸 하루였다. 

언젠가부터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에는 다른 날에 비하여 집안일을 많이 하게 된다. 해가 나지 않는 날은 특히 청소하기가 좋다. 이유는 먼지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화창한 날에 대청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햇살이 잘 들어오는 날에는 청소를 마무리 하고 나서도 돌아보면 금방 내려앉은 먼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대청소 날은 항상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을 선택한다. 청소 끝내고 돌아보는 집안은 완벽하게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다. 

아침 먹으면서 작정한 일은 주방의 그릇 교체부터 시작 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나 문득 생각 날 때마다 그릇을 바꿔가면서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한동안 그릇 바꾸는 것을 잊고 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몇 벌 되지 않는 그릇을 20년 동안 바꿔 보았자 그 계절에 쓰던 그릇 그대로인데 또 바꿔 놓고 보면 아주 다른 그릇인 것 같은 생각이드니 참 모를 일이다. 

나의 물건들은 모두가 골동품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접시나 그릇이 짝이 맞지 않으면 잘 사용하지 않게 되는데 오래도록 쓰는 그릇들도 잘 깨지지 않아 오래 된 것도 잘 쓰고 있다. 남들은 접시 이가 빠져서 쓰지 못한다는데 어째든 내 손에 들어오면 무조건 10년은 넉넉하게 사용하니 가끔은 이렇게라도 바꾸지 않으면 너무 지루하다. 

겨울동안 사용했던 무거운 도자기 그릇을 치우고 얼마 전에 선물 받은 칸나 그림이 그려진 그릇으로 바꿨더니 주방에도 봄이 온듯하다. 훨씬 날렵하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런데 수저받침이 또 하나 모자란 세 개 밖에 없다. 하나 빠진 수저받침이 몇 벌인지 모른다. 지난 주말 동생네가 왔다가 동생이 설거지 하면서 빠뜨린 것이 분명하다. 항상 다른 사람이 설거지를 하고 난 다음에 없으니 작아서 음식쓰레기를 버릴 때 함께 딸려나간 것이리라. 이제 수저받침은 살 때 아예 여유분까지 생각해서 여섯 개나 여덟 개를 사야하는지 곰곰이 생각 좀 해야겠다.

그리고 나란히 있던 소파를 이리저리 끌어다가 위치를 바꾸었다. 하얀 벽에 흔하디흔한 가족사진 하나 없으니 오늘따라 벽면이 아주 썰렁해 보인다. 포장을 뜯지 않고 벽장에 쌓인 액자를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면 공사가 너무 커 질것 같아서 포기했다.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던 소파방향을 베란다를 향하게 하고 시야를 가린 고무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보니 눈부시게 들어오는 빛을 고스란히 쬘 수 있다. 소파에 동그만 앉고 보니 앞 동 그늘에서 지각으로 피는 자목련이 청초하게 피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흐린 날의 초상_1
흐린 날의 초상_1

대충 앞치마를 벗어 식탁의자에 걸쳐 놓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훈풍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날카롭지 않은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햇님이 들락날락 하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머그컵 한 컵 정도의 물은 금방 보글보글 끓었다. 봉지 커피를 털어 넣고 물을 담았더니 은은한 원두의 향이 그윽하다. 

전업 주부가 좋은 것은 집안일에서는 무엇이든 내 멋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스팀청소기를 밀고 싶을 때가 있고 또 오늘 같은 날은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걸레질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 청소기 돌리지 않고 정리만 하고도 식구들에게 집안일 많이 한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으니 커피 마시면서 하루를 빈둥댄다고 말 할 사람도 없다. 

적당하게 식은 커피 맛이 정말 최고이다. 푸름을 더해가는 장미 넝쿨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도 좋고 찔끔거리는 빗속을 우산을 쓰고 종종 걸음을 치는 행인들을 구경하는 것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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