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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에 다시 생각나는 시어머니
청각장애인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 마음
2013-04-21 03:06:10최종 업데이트 : 2013-04-21 03:06:10 작성자 : 시민기자   안세정

"사실은….우리 엄마 청각장애인이야~"
"근데? 그게 뭐 어때서?"

지금의 남편과 연애시절 이야기다. 어느 주말 데이트 코스로 '관악산' 등반을 택했고, 관악산 정상에서 남편은 아주 어렵게 어머니가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에 나는 그가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마치 오랫동안 묵혀두었다는 듯 힘겹게 꺼내놓은 그 고백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무슨 흉일까?' 

나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에 그는 무척이나 안도하더니 바로 내게 청혼을 했다. 자신의 엄마가 청각장애인임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 여자,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구나.'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장애인의 날에 다시 생각나는 시어머니_1
녹록치 않은 시골살이 늘 묵묵히 감내하며 건강히 살아주시는 시부모님께 감사하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 첫 명절. 시댁에 내려갔다.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여러 가지 나물과 고기, 전 등을 하는 어머니에게 손발을 맞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말씀을 못하셔서 도대체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싶어 하시는지 어떤 속내를 가지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계속 눈치를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여간 머리가 아픈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편을 찾으려고 하니, 아들들은 그냥 자게 두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나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작은 아버님댁 가족들이 오시고 모두 쪼르르 줄을 서서 제사상에서 잠시 인사를 한 후, 몇 시간동안 정성들여 준비한 제사상은 삽시간 만에 모두 해체되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한 번도 제사상을 차려보거나 절차 등을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참 낯설고 힘든 풍경이었다. 제사상을 치우고 밥 먹고 나니 설거지가 한 가득이었다. 결국 나는 새벽부터 오후까지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거나 억지로 하게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어머니가 "너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라고 해주면 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필요를 수시로 스스로 체크해야 하니 도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명절의 첫 날을 힘겹게 보내고 자리에 누웠는데 남편이 나에게 꺼낸 말이 가관이 아니었다. "엄마가 그러는데, 자기 왜 그렇게 잠이 많냐고~ 새벽에 엄마 일어났을 때 바로 도와줬어야 하는데, 며느리는 계속 잠만 잔다고 뭐라고 하더라~ 네가 그러면 다음에 들어오는 며느리들도 똑같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철철 났다. 당시 남편은 늦깎이 대학생이었는데 그런 남편 뒷바라지 위해서 늘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했던 나였다. 물론 남동생이 하는 의류사업을 돕고 있었고 당시에 호황이어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바빠서 늦은 밤이나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날이 비일비재한 일상이었다. 정작 본인이야말로, 며느리가 얼마나 힘겹게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당신이 일어나는 새벽 4시에 벌떡 일어나지 않았다고 당신 아들들에게 내 흉을 보았다니 정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시골에 내려가기 전날까지도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던 내 사정은 전혀 모르시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너무 서운하고 속이 상했다.

그 이야기를 전한 남편도 너무 미워서 그 명절은 내내 뽀로통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 신혼집을 보러 오신 시부모님에게도 상냥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자기 딸이라면 그렇게 하셨을까, 이렇게 없는 집안에 시집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는 거 아냐?'라는 안 좋은 생각들만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가다간 서로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 어머니의 입장을 되짚어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사고로 청각장애인이 된 후, 아버님께 시집와서 온갖 무시와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하셨다. 아이를 낳고 미역국 한 사발,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바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셔야 했다. 그러면서도 늘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삼형제를 보란 듯 잘 키워내셨다.

그런 어머니 눈에는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을지라도 시댁에 와서 보내는 첫 명절인데 시어머니 일을 즉각 돕지 못하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본인이 청각장애인이니 내가 생각지 못한 열등의식이나 자괴감이 있을 터, 처음으로 들어온 며느리가 시어머니 무서운 줄 모르고 늦게까지 자고 있으니 얼마나 울분이 생기셨을까. 

그렇게 어머니의 일생을 같은 여자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편이 많이 아쉽다. 때로는 수화기를 들어 시댁에 전화했을 때 시어머니와 미주알고주알 남편의 흉도 보고 아이들 이야기며 일상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날인 어제 4월20일, 길을 가다가 노점에서 호떡장사를 하고 있는 청각장애인 부부를 보니 시어머니가 떠오른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당신은 얼마나 답답하실까를 돌이켜보니 좀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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