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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에서 만난 정조의 어심
2013-03-27 15:22:03최종 업데이트 : 2013-03-27 15:22:03 작성자 : 시민기자   심춘자

오래간만에 중학교 동창들과 강릉 오죽헌에 다녀왔다. 친정을 오가면서 강릉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는데 오죽헌에 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와보고 처음 왔으니까 30년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오죽헌에서 만난 정조의 어심_1
오천원 지폐 구권 배경이 되었던 곳
 
추억 속의 오죽헌은 아담하고 오죽이 많았었다. 그리고 한복을 입고 예절교육을 받았던 교육관은 굉장히 웅장하고 큰 건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오죽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구부터 생경하다. 넓은 공원화 된 오죽헌은 율곡이이 선생의 동상이 가장 먼저 맞아주었다. 서적이나 옛 기억의 추억 속의 모습이 아니라서 조금 어색했지만 그 분의 업적에 비하면 넘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죽헌은 율곡기념관과 향토민속관 그리고 시립박물관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한곳에서 볼 수 있어서 발품을 파는 피곤을 덜게 되었지만 예전의 오죽헌의 고요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먼저 율곡 이이선생의 영정이 있는 문성사로 가기로 했다. 검은 대나무가 전각을 빙 둘러 싸고 있어 아늑하게 보였다. 영정을 모신 문성사의 현판은 박근혜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썼다고 한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전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오죽헌에서 만난 정조의 어심_2
오죽헌

오죽헌에서 만난 정조의 어심_3
오죽헌 내부

문성사 옆에 있는 오죽헌은 왼쪽 방은 여섯 살까지 율곡선생이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방은 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방이라고 하여 몽룡실이라고 하며 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방에서 마당을 내다보면 오른쪽에 큰 백일홍 나무도 있다. 강릉의 시화이기도 한 이 배롱나무는 600년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공을 들여서 키웠는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오죽헌 후원 곳곳에 매화나무도 많다. 사임당이 키우고 어루만졌을 매화나무가 수묵화의 한 폭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강릉은 겨울에 눈도 많이 내리고,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지만 겨울동안 따뜻한 지방으로 유명하다. 봄이라고 확신한 목련들이 서둘러 꽃피우려다가 게으른 추위의 철퇴를 맞았다. 지각하여 내린 눈에 꽃잎이 얼어서 반쯤은 얼어 누렇게 추접한 몰골을 드러냈다. 
그 꽃나무 아래 어린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뛰어 다닌다. 30년 전 우리 모습도 지금의 저 아이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검은색 통치마에 하얀 칼라가 있는 교복의 색깔이 조금 변하고 디자인이 좀 더 예뻐졌다는 것 말고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꿈 많고 욕심 많은 것은 다름이 없지 않을 것이다. 

오죽헌에서 만난 정조의 어심_4
정조대왕의 친필과 율곡선생저서<격몽요결>

예전에는 없었던 안채와 바깥채를 지나 어제각으로 향했다. 어제각은 율곡이이 선생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했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어진 곳이다. '격몽요결'은 어린이에게 부모를 봉양하고 남을 대접할 줄 알며, 몸을 닦고, 독서의 방향을 교육하기 위해 이이가 1577년(선조 10)에 저술하였다고 한다. 

1788년 정조 대왕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본 다음 벼루의 뒷면에 율곡 이이를 찬양하는 글을 새기고 머리말을 지어 잘 보관하라고 돌려보냈다는 내용은 '이이수필 격몽요결' 서문에 전해진다고 한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아 집을 지었는데 바로 어제각이라고 한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상청 일기예보는 변화무쌍하다. 봄이라는 계절이 본래 변덕스러운 것이 시집 못간 처녀의 가슴과 같다는 말이 있지만 바람이 요사스럽다. 야외 전시장에 다양한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향 시골 마을 어귀에서 흔하게 보았던 것과 별반 다름을 발견하지 못한다. 선사시대 유물부터 현재의 장독대까지 바람만 조금 덜 불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여유 있게 추억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듯이 또 다른 추억의 한 페이지를 그렸을 것이다. 

오죽이 60년을 살며 꽃이 피고 나면 죽는다는 오죽헌 입구에 있는 안내 팻말을 보면서 무엇이든 한 번에 부족함을 채울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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