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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근본은 '충'과 '효'에 있다" 정조의 얼을 좇아서
수원문화원, '역사문화 뿌리 찾기 4차 답사' 진행
2023-09-26 09:59:10최종 업데이트 : 2023-09-27 10:28:57 작성자 : 시민기자   진성숙

수원향교

수원향교 대성전앞에서


수원문화원이 개최한 '뿌리찾기 답사 4차기행'이 지난 9월 23일 열렸다.
주말 일정인만큼 부부 동반 참석자들이 다수였다. 필자도 남편과 동행할 수 있었다. 더위도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좋게 부는 맑고 쾌청한 가을날이었다. 이날 답사는 '정조대왕의 얼을 좇아서' 테마를 기반으로 이동근 광교박물관 학예사의 해설을 들으며 4군데의 역사 장소를 탐방하는 방식이다. 

 

오전 9시 팔달산 자락 수원문화원에 모인 시민들과 스태프 30여 명은 이동근 학예사의 인사말을 듣고 향교로 출발했다. 평소 향교는 닫혀 있고 탐방이나 행사 때만 열리고 있단다. 서울 성균관을 닮은 향교의 문이 열렸다. 맨 처음 만나는 홍살문은 아무데나 있지 않고 반드시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곳에 설치된다고 한다. 홍살문은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홍살문 안에 들어가면서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수원향교는 고려시대 때 충렬왕 때 세워져서 거의 600년 이어오고 있다. 지금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은 1789년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면서이다. 정조가 제일 먼저 수원에 와서 한 것은 무엇보다 향교에서 공자에게 성묘를 한 것이다. 그만큼 충과 효를 중시하였고 백성들에게도 본받기를 강조한 것이다.

향교는 두 가지의 기능을 갖고 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공부를 하고 생활을 하는 공간이며 석전대제는 유교의 가장 대표자 공자와 성인들에 대한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향교는 오늘날 유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는 의미가 거의 퇴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 한국에서만 유교사상이 올곧고 건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형국이란다. 일본에서도 유교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베트남에 약간 남아있으나 미미한 실정이다. 중국은 문화 대혁명 때 옛것을 말살시다시피해서 유교적 문화가 거의 사라졌으며,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조선의 유교주의적인 정치의 뿌리이다. '충'과 '효'라는 개념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수원향교 대성전에 공자와 맹자 위패가 위치해있다. 수원향교에 들어서면 마당 왼쪽에 멋들어진 공자상이 있다. 2003년 중국 제남시에서 수원향교의 공자상을 기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제남시가 수원시와 자매 결연을 했기 때문이란다. '아 그런 아름다운 교류가 이어지고 있구나' 

 

작은 박물관 후소의 앞뜰

작은 박물관 후소의 앞뜰


수원에는 현재 세 군데의 박물관이 있다.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 박물관 그리고 광교박물관이 있다. 후소는 수원박물관의 부속박물관처럼 쓰이고 있다. 


행궁 가는 길, 후소에 잠시 들렀다. 늘 보아도 정원이 유독 아름다운 후소는 원래 수원 백병원원장의 사택이었는데 수원시가 사들인 것이다. 이날도 '자비대영화원 장안종'이란 제목의 전시회(시간상 내용은 생략하니 시민들께서 나중에 들러보시기 바람)가 열리고 있었고 최인영 학예사의 해설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2층에 올라가 수원의 문화발전을 위해 애쓴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의 저자, 오주석 선생의 서재에 들러 그의 업적에 대해 들었다. 필자는 수원에 이사오기 전 KBS다큐멘터리로 오선생을 접하였다. 오 선생은 49세에 아깝게 백혈병으로 타계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래서 수원의 많은 친구들과 동기들이 그의 뜻을 같이 살려보고자 노력해서 후소 공간이 태어났다.

 

행궁입구서 행사준비중인 학생들

행궁입구서 행사준비중인 학생들


이어서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원래 시흥행궁과 화성행궁 두 곳이 있었다. 시흥행궁은 지금의 금천구청 터로서 흔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큰 효심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개혁군주로 통하는 그는 문체반정을 일으키고 서울을 혁파하며 규장각을 세우면서 문인을 양성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또한 농업 발전을 위해 수원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정조가 수원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분명한 낭설로 정권이 계속 안정되고 아들이 장성하면 양위를 하고 어머니와 내려와 살 작정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수원행궁 낙남헌앞에서 이동근 학예사 명강

수원행궁 낙남헌앞에서 이동근 학예사 명강


정조는 수원화성에 13번이나 행차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백성들을 살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역병이 돌았을 때는 특히 세정을 살펴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덕 있는 임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들르며 백성들도 돌아보는 능행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1795년에는 능행차 8일간의 기록을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책으로 남겨놓아 오늘날 위대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참가자들은 이동근 학예사와 함께 행궁을 천천히 돌아보며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행궁건물 중 6.25 등 전란에 파괴되고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가장 온전히 보존된 건물은 낙남헌뿐이라고 한다. 임금이 나아가 노인을 위한 잔치를 베풀던 곳이란다. 나머지는 다 고증에 의해 복원되었다. 
 

봉수당의 내부를 비교적 상세히 고찰하였다. 봉수당은 공식적인 공간으로 임금님이 신하들을 만나거나 백성들을 만났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봉수당 안쪽에서 뒤쪽은 회랑으로 복도가 안쪽 공간이랑 길게 다 연결되었다. 이곳은 혜경궁 홍씨가 잠을 청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행은 행궁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하고 버스를 타고 용주사로 향했다.
 

용주사 5층석탑 (고려때 건조)

용주사 5층석탑 (고려때 건조)

 

현룡원 묘역(윤건릉) 조성 후 이전하면서 용주사가 만들어졌다. 원래 절이 있었고 터만 남아있었는데 정조는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명한다. 그리고 절 이름을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라'라는 뜻으로 용주사라 이름 짓는다. 용주사의 대웅보전 앞에는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품격 있는 5층 석탑이 있고, 천보루는 2층에 있는 구조이다. 

 

용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대웅전 석불 뒤 탱화이다. 김홍도가 이것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김홍도가 혼자 그린 것이 아니라 화원들과 같이 그린 듯하다. 

 

또한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형식을 갖춘 고려시대 초기의 거대한 범종이다.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龍鈕)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발로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몸체 앞뒤를 보면, 비천상 좌우에는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 종인 이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종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조지훈의 유명한 시 '승무'는 그가 용주사에서 추는 승무를 보고 착안해 지은 시라고 한다. 필자도 처음 듣는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용주사 동종의 아름다운 비천상

용주사 동종의 아름다운 비천상


마지막으로 융건릉에 들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조가 묻힌 건릉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훨씬 성대하고 격조가 있어 보인다. 그건 정조가 생전에 효를 다해 아버지 무덤을 정성껏 조성했기 때문이리라.
 

역사를 되짚어보면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세자해버려서 나중에 정조와 혜경궁 홍씨를 궁궐 밖으로 쫓겨나게 하였지만 영조가 머리를 써서 어린 이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이 되게 한다.

노론 세력이 정조가 왕이 되는 걸 방해했지만 영조는 손자를 당파싸움에서 잘 지켜내고 정조를 도량있는 군주감으로 키워낸다.
 

그러나 정조는 취임사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덕성있게 통치를 잘 해서 오늘날 추앙받는 군주가 됐으리라. 정조는 아버지 산소를 명당으로 옮겨드리기 위해 어전회의를 소집해서 명당 자리를 찾아내었는데 그중에서 낙점된 곳이 이곳 융건릉 자리라고 한다. 전국에 왕릉은 42개 그중 두 개는 북한에 있고 40기가 남한에 있는데 융건릉은 가장 방문객이 많은 능이라고 한다.
 

융릉에서 건릉 가는길

융릉에서 건릉 가는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주체가 되어  매번 제사를 지내는데 정조는 음력으로 6월 28일 날 지내고 사도세자는 양력으로 7월 12일 날 지낸다고 한다. 

 

해설사는 유명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정조가 아버지 묘를 가꾸고 있는데 송충이들이 묘를 갉아먹고 있는 것 보고 속상해서 그 송충이를 이로 뜯어 뱉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송충이가 급감하더란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 또 백성들에게 송충이를 잡아오게 하고 현금으로 보상을 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규원 참가자는 "참 보람 있는 답사였다. 평소 구경하기 어렵다는 향교에서 중국제남시에서 보내온 공자상도 구경하고 충과 효의 의미를 되새기며 홍살문의 정확한 의미도 깨달았다. 처음 가본 용주사도 정조의 원대로 지었다니 달리 보이고 고려시대때 건조되었다는 범종의 비천상도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현순교 참가자는 "수원에 오래 살았어도 보기 어려운 향교를 볼수 있어 좋았고 좋은 날씨 속에 학예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 유적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 좋았다."라고 말했다. 
 

정조의 건릉

정조의 건릉


고즈넉하고 조용한 능행길은 마음을 위무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지나온 선대의 발자취에서 공을 기리고 과오를 반성하는 가운데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구현하고자 한다.
 

효와 덕행의 정조의 발자취를 따라 간 역사기행. 마음이 경건해지며 온고이지신을 생각하게 된다.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임시공휴일까지 더해져 6일간의 긴 연휴를 맞이하게 되어 더 반가운 추석이다. 

사무치는 육친의 정에 목말라하며 평생 아버지를 그리며  '효'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정조. 이번 추석에는 그러한 정조를 닮아 조상의 얼과 덕을 기리고 흠모하는 명절이 되길 바란다. 
 

한편 수원문화원은 오는 10월에 올해의 '뿌리찾기 답사여행 5차'를 마지막으로 실시한다. 10월 4일부터 수원문화원 홈페이지에서 신청 가능하며, 참가비는 3만 원이다. 그리고 2024년에는 뿌리찾기 답사가 주말이 아닌 평일에 시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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