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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 야외 전시물 둘러보기
나무와 비석이 품고 있는 역사 이야기
2023-05-17 15:21:18최종 업데이트 : 2023-05-17 15:27:5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나무와 선정비가 서 있는 박물관 입구. 아름다운 풍경에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심신이 맑아진다.

나무와 선정비가 서 있는 박물관 입구. 아름다운 풍경에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심신이 맑아진다.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갔다.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쉰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박물관 주변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 조용하고 주변 경치도 좋다. 제법 웅장한 건물인데 광교산 중턱에 안겨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푸른 나무들이 서 있고 햇살은 밝게 쏟아지고 있다. 박물관에서 보니 광교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박물관 전시회에 오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보고 야외는 그냥 지난 기억이 있다. 오늘은 야외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본다. 나무와 선정비가 서 있는 길이 속세를 벗어나 고즈넉한 공간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심신이 맑아진다. 

야외 전시장에 쉼터. 여기 나무는 정조 때에 편찬한 《식목실총》을 참고로 수원지역에 적합한 수목을 선정해 심어놓았다고 한다.

야외 전시장에 쉼터. 여기 나무는 정조 때에 편찬한 《식목실총》을 참고로
수원지역에 적합한 수목을 선정해 심어놓았다고 한다.


 야외 전시장을 나무가 보호하고 있는데, 이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심지 않았나 보다. 안내판에 정조 6년(1782년)에 편찬한 《식목실총》을 참고로 이식이 쉽고 수원지역에 적합한 수목 9종(소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팥배나무, 석류나무, 청단풍, 산수유, 산딸나무, 이팝나무)을 선정해 심어놓았다고 한다. 이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 각종 전시물이 있다. 박물관에 맞게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나무를 심었다. 나무 하나도 허투루 심지 않았다니 박물관 관계자들의 정성이 대단하다.

 청동기 시대(금곡동 움집터)부터 이고 선생 유훈비(고려말 조선 초 학자, 2013년에 문중에서 세움)까지 오랜 시간의 역사도 있다. 정조가 수원 현륭원 원행길 이정표로 세운 괴목정교 표석,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의 묘비, 효자 정려문 등 우리 지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물이 많다. 

수원도호부 부사 민진원의 선정비. 거북 등에 비신을 세운 것이 제법 화려하고 격식을 갖췄다.

수원도호부 부사 민진원의 선정비. 거북 등에 비신을 세운 것이 제법 화려하고 격식을 갖췄다.


 그중에 수원을 다스렸던 관리의 송덕비는 여러 개 있다. 수원 부사, 수원 유수, 관찰사, 판관, 중군 등 수원을 다스렸던 관리의 업적과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수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노송지대에 모아 두었다가 여기에 전시하고 있다. 수원박물관에 27기, 화성박물관에 10기가 야외에 전시 중이다. 수원시에서는 송덕비 37기를 향토유적 제3호로 일괄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원 유수 민승호의 불망비.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로 당시 민씨 정권의 수장이었지만, 비석은 소박하다. 머릿돌 없이 위쪽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것 이외는 장식이 없다.

수원 유수 민승호의 불망비.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로 당시 민씨 정권의 수장이었지만, 비석은 소박하다.
머릿돌 없이 위쪽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것 이외는 장식이 없다.


 거북 등에 비신을 세운 것이 보인다. 제법 화려하고 격식도 갖췄다. 높은 신분일 거라는 예상을 했는데, 맞았다. 조선 후기 척신 민진원(1664년~1736년)의 선정비다. 그는 인현왕후의 작은오빠다. 민영익, 순명효황후(순종황제의 정비)의 6대조이며, 명성황후의 종 5대조가 된다.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1701년~1703년에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했다. 

수원 유수 김홍집의 선정비. 조선 말 개화파의 거두 정치가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갑오개혁 이후 최초의 총리다.

수원 유수 김홍집의 선정비. 조선 말 개화파의 거두 정치가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갑오개혁 이후 최초의 총리다.

 
 반면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 민승호(1830년~1874년) 불망비는 소박하다. 머릿돌 없이 위쪽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것 이외는 장식이 없다. 크기도 다른 것에 절반밖에 되지 않아 초라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민씨 정권의 수장이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수원 유수를 지낸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수원지역은 중앙에 주요 인물이 유수로 발령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72년부터 1873년까지 수원 유수로 재임했다. 

 선정비에 김홍집(1842년~1896년)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조선 말 개화파의 거두 정치가다. 1889년(고종 26)부터 1890년까지 수원 유수로 재임했다. 지붕돌로 덮은 비가 있고, 머릿돌 없이 위쪽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비가 나란히 있다. 

서유린의 묘표. 화성 유수로 재임했는데, 이때 선정을 기리는 비가 화성박물관에 있다. 양자 서준보도 수원부 유수를 역임했다.

서유린의 묘표. 화성 유수로 재임했는데, 이때 선정을 기리는 비가 화성박물관에 있다.
양자 서준보도 수원부 유수를 역임했다.


 박물관 야외에는 달성 서씨 석물이 있다. 이 중에 서유린(1738년~1802년)의 묘표가 있다.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로 재임했는데, 이때 선정을 기리는 비가 화성박물관에 있다. 참고로 서유린의 양자인 서준보(1770년~1856년)도 수원부 유수를 역임했다. 대를 이어 수원부 유수를 지냈다. 이런 인연으로 대구를 떠나 수원에 석물을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석(1878년~1970년) 자선 송덕비도 관심이 간다. 나혜석의 사촌 오빠다. 나이 차가 18살로 마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선생은 수원의 대부호였던 나주나씨 집안의 종손으로 민족계몽 운동과 사회 구제 활동을 했다. 이하영 목사, 임면수 선생 등과 함께 삼일여학당 설립에 참여했다. 이 학교에 토지 900평을 기부하기도 했다. 

나중석 자선 송덕비. 선생은 관리는 아니었다. 수원의 대부호였던 나주나씨 집안의 종손으로 민족계몽 운동과 사회 구제 활동을 했다. 나혜석의 사촌 오빠다.

나중석 자선 송덕비. 선생은 관리는 아니었다. 수원의 대부호였던 나주나씨 집안의 종손으로 민족계몽 운동과 사회 구제 활동을 했다. 나혜석의 사촌 오빠다.

 
 사회 구제에도 힘썼는데, 논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당시 농지를 무상으로 받은 사람들이 1947년(빗돌에 단기 4280년이라고 기록)에 마을(봉담읍 분천리) 어귀에 송덕비를 세웠다. 비에 한시가 '오직 공의 자비와 은혜는 살아있는 부처의 변하지 않는 경지요, 소작땅을 나눠주며, 위기를 보면 반드시 구제하네, 어려움을 돕는데 지체함이 없으니, 그 윤택함이 후손에게 흘러가리'라고 선행을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온다. 읽는 사람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2012년 수원박물관으로 이전해 보존하고 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말을 건다. "왜 그렇게 사진을 찍으세요."라고 한다. 시민기자라는 말에 "어, 여기 우리 아지트데, 너무 알려지면 안 돼요."라고 웃는다. 조용해서 동네 카페보다 좋다고 한다. 그래서 모임도 여기서 자주 한다고 비밀이라도 밝히듯 말한다.

 선정비는 전국에 많다. 조선말에 학정을 일삼은 수령들이 치적을 포장하는 비도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가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풍스러운 유물이 됐다. 이끼 낀 빛깔에 글씨도 닳고 희미해졌지만, 역사가 담겨 있다. 비석이 침묵을 토해내고, 내면도 모처럼 고요하다. 비록 덧없고 부질없는 허세의 돌덩어리일지라도 당시 사람들의 정신과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방문객에게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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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 선정비, 야외전시장, 정조,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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