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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의 역사가 담긴 수원 이야기
오월이면 어버이 은혜 더욱 생각나
2023-05-04 15:01:42최종 업데이트 : 2023-05-04 11:18:18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팔달산 정상에 있는 효원의 종.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염원을 담아 만들었다. 소액을 내면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종을 칠 수 있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효원의 종.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염원을 담아 만들었다. 소액을 내면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종을 칠 수 있다.

  5월은 날씨가 참 좋다. 햇살은 부드럽고, 자연은 푸른빛이 절정이다. 가족의 달이라고 하는 것처럼 기념일도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날에 근로자의날, 부처님오신날까지 여유와 풍요가 넘친다. 그런데 어버이날은 입에 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 온다. 넓고 큰 은혜를 받기만 하고, 보답하는 것은 미치지 못한다는 마음 때문이다. 
수원은 효에 관한 이야기로 고려 때 최루백이 있다. 그의 효행은 고려사에 전하고,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도 있다. 현재 봉담읍에 효자각이 있다.

수원은 효에 관한 이야기로 고려 때 최루백이 있다. 그의 효행은 고려사에 전하고,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도 있다. 현재 봉담읍에 효자각이 있다.


  연휴에 가족끼리 만나고, 팔달산 정상에 올랐다. 종소리가 그리움처럼 들린다. 누군가 효원의 종을 치고 있다. 종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염원을 담아 만들었다. 소액(1~2명 1,000원)을 내면 종을 세 번 칠 수 있다. 첫 번째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두 번째는 가족의 행복을 빌면서, 세 번째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종을 친다. 종소리에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라는 음률이 섞여 들리는 듯하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고려말 문신 이고의 비. 그는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시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막을 지키고 살았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고려말 문신 이고의 비. 그는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시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막을 지키고 살았다.


  수원은 효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고려 때 최루백은 호장 최상저의 아들로 한림학사를 지냈다. 아버지가 호랑이에 물려 가자, 어린 최루백은 도끼로 호랑이를 단숨에 내리쳐 죽이고 그 배를 갈라 아비의 살과 뼈를 수습하여 장사했다. 최루백의 효행은 고려사에 전한다.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 그 일화가 남겨 있다. 조선 시대에는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웠다. 현재 봉담읍 분천리 165-1번지에 효자각이 있다. 
지지대 근처 효행 공원에 정조대왕 동상. '효원의 도시' 수원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 정신으로 건설됐다.

지지대 근처 효행 공원에 정조대왕 동상. '효원의 도시' 수원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 정신으로 건설됐다.


  고려말 문신 이고도 효자다. 나라가 혼란스러워 수원 탑산(塔山-태조 이성계가 화공의 그림을 보고 사통팔달해 팔달산으로 이름함)에 은거하며 살았다. 그는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시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막을 지키고 살았다. 이때 아침저녁으로 애통해하는 마음이 지극해 피눈물이 나고, 결국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됐다. 세종 때 마을 입구에 '고려 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를 세웠고, 정조는 집터에 효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학사대를 세웠다. 그는 적사리로 이사해서 권선징악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였는데, 고종은 그 마을을 권선리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정자동 효자문 사거리. 선경 중앙 연구소 근처에 효자문이 있었기에 길 이름에 흔적이 남아 있다.

정자동 효자문 사거리. 선경 중앙 연구소 근처에 효자문이 있었기에 길 이름에 흔적이 남아 있다.


  수원 건설을 한 정조의 효행은 남다른 면이 있다. 아버지 묘를 화산 아래로 옮기고, 수원에 행궁을 짓고 매년 아버지를 찾았다. 지지대 비각에는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다. 정조는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지대 고개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뒤에도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행차는 느릿느릿 움직였고, 이에 따라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이유로 수원은 효원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의왕시에서 수원으로 오는 길목에 효행공원은 지지대 고개와 잘 어울린다. 인계동의 효원공원도 수원의 역사적 의미를 이어가는 공간이다. 다양한 조각상과 기념물을 세워 어린이들에게 효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 준다. 효원공원 덕분에 길 이름도 효원로다. 근처에 효원고등학교, 효원초등학교, 효동초등학교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 효원의 도시에 맞는 이름이다.
호매실동 효자문교. 여기도 효자문이 있었지만, 도시 계획에 밀려나고 다리 이름에 흔적이 남아 있다.

호매실동 효자문교. 여기도 효자문이 있었지만, 도시 계획에 밀려나고 다리 이름에 흔적이 남아 있다.


  정조 이후에도 수원은 효자가 많았다. 수원시 정보에 의하면 조존용(趙存庸)은 1823년에 태어나 정3품 통대부를 지냈으며 사헌부 감찰, 연일 현감 겸 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그의 효행이 깊어 임금이 효자문을 내렸다. 효자문은 정자1동 480번지(선경 중앙 연구소 북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나무 현판이 있었으나 후손이 1998년 용인시 원삼면으로 옮겨 갔다. 정자동에 효자문 사거리는 지역 이름이 있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수원박물관에 효자 정문. 금곡동 상촌의 전주류씨 종가인 류원상 씨 댁 대문 옆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수원박물관에 효자 정문. 금곡동 상촌의 전주류씨 종가인 류원상 씨 댁 대문 옆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호매실동에는 효자문교가 있다. 조선 후기 한의리는 병환 중인 어머님께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봉양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했다. 이런 효성을 알게 된 고종이 효자문(호매실동 402-62번지)을 내렸다고 한다. 효자문은 도시 계획에 밀려 2000년에 화성군 향남면 독정리에 신축 이전했다. 여기도 역시 다리 이름에 흔적만 남아 있어 역사를 전한다. 
  수원박물관에는 효자 정문이 있다. 상촌의 전주류씨 종가인 류원상 씨 댁 대문 옆(권선구 금곡동)에 있었다. 2008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원본은 보관 중이고 박물관 야외에 재현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수원특례시의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수동 김성배 효자비. 그는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도려 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당수동 김성배 효자비. 그는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도려 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당수동에는 김성배 효자비가 있다. 그는 화성군 당수동 지역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어머니가 오랫동안 아팠다. 정성껏 병시중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그때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도려 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화성군에서 1992년 효자비를 세워 그의 효성을 널리 알려 본보기가 되게 했다. 수인선 도로가 확장되면서 경기 대명고등학교 건너편에 있었던 것을 경기 대명고등학교 정문 안쪽으로 이전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그 이후에도 수원에는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자가 많다. 지금도 시청은 매년 어버이날 기념행사로 효행상을 표창한다. 효행상을 받지 못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르신들은 자녀와 가족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고 희생하셨다. 어버이날을 맞아 그분들이 더욱 존중받는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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