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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돌이 아름다운 수원 화성
차가운 돌이 부드러운 성벽이 되다
2023-04-17 10:20:12최종 업데이트 : 2023-04-17 14:37:11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화성 축성의 시작은 돌 뜨기. 1794년 1월 7일 숙지산의 신령에게 제문을 올리고 돌을 떴다(화성박물관 전시 자료).

화성 축성의 시작은 돌 뜨기. 1794년 1월 7일 숙지산의 신령에게 제문을 올리고 돌을 떴다(화성박물관 전시 자료).


  수원 상징은 서북공심돈을 형상화했다. 여기에 아래 이미지는 미래의 창과 행복의 땅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래 모습은 바로 화성의 성곽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곡선은 굽이굽이 돌아간 성벽을 추상화했다고 해도 딱 맞는다. 자주 서장대에 오르는데 여기서 보면 성곽이 물길처럼 굽어 돌아간다.
  화성 성벽은 돌로 됐다. 돌은 차갑고 단단한 이미지다. 돌로 지었지만, 높은 곳에서 보는 성벽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드러운 것은 뭐든 살아 있다. 딱딱한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부드럽다고 약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드러움이 오히려 강하다. 그래서 오래 남아서 인상적인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화성 성벽. 시간의 이끼에 거뭇거뭇해진 빛깔도 초라하지 않고 은은한 멋이 풍긴다.

화성 성벽. 시간의 이끼에 거뭇거뭇해진 빛깔도 초라하지 않고 은은한 멋이 풍긴다.


  성벽은 행궁 등 성내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물이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시설인데도 그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다. 돌벽을 걸으면 좋고, 기대면 더 좋다. 햇빛도 바람도 돌벽에 스며들어 쉼을 즐기는 것을 느낀다. 도심 속 샘물 같은 공간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성벽 재료에 관해 의논한 기록이 있다. 처음 성을 쌓으려 할 때 지역이 돌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벽돌을 써야 하느냐, 토성으로 쌓아야 하느냐 의견을 나눴다. 결국 돌로 할 것을 결정했는데, 당연히 돌로 쌓았을 때의 강도 등이 언급됐을 것이다. 인근 지역에서 돌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도 고려 대상이었다. 

창룡문. 성벽 돌은 가까이 보면 원형에 가깝다. 저 돌들이 서로 맞물며 기능에 충실한 성벽이 됐다. 작은 조각들 하나하나가 전체 무늬를 이루는 모자이크처럼 투박한 돌들이 모여 작품이 된다.

창룡문. 성벽 돌은 가까이 보면 원형에 가깝다. 저 돌들이 서로 맞물며 기능에 충실한 성벽이 됐다. 작은 조각들 하나하나가 전체 무늬를 이루는 모자이크처럼 투박한 돌들이 모여 작품이 된다.


  축성의 시작도 돌 뜨기였다. 1794년 1월 7일 숙지산의 신령에게 제문을 올리고 돌을 떴다. 돌 뜨는 곳은 숙지산과 여기산 두 산에 설치하고, 권동에 하나를 두었다. 대체로 숙지산의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았으나 결이 조금 더 가늘었다.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칠었다. 돌을 캔 숫자는 숙지산 돌이 81,100여 덩어리, 여기산 돌이 62,400여 덩어리, 권동의 돌이 30,200덩어리, 팔달산 돌이 13,900여 덩어리였다.

숙지산 돌 뜨던 흔적. 구멍을 파고 나무를 박아 물을 부어 나무의 팽창력을 활용해 채석한 흔적이다.

숙지산 돌 뜨던 흔적. 구멍을 파고 나무를 박아 물을 부어 나무의 팽창력을 활용해 채석한 흔적이다.


  돌은 석공이 제자리에서 다듬어서 무게를 덜었다. 돌덩이를 크고 작게 하는 것은 몇 등급으로 나누어 깎고 잘랐다. 이렇게 하면 실어나르는 데도 편하다. 돌을 운반할 때는 생 칡을 이용했다. 그리고 왕실에서 하사한 거중기를 사용했는데, 당시는 1대만 있었다. 이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드는 기구로 정약용이 만들었다.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돌을 들어 올렸다. 큰 돌을 옮기고 들어 올리는 데는 녹로와 유형거도 썼다. 이도 역시 정약용이 발명한 기구다. 

  성역에 참여한 공장은 석수, 목수, 이장 등 21종으로 1,800여 명인데, 그중에 석수가 642명으로 가장 많았다. 공장은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약 60% 차지했고, 수원,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 차출되었다. 그러나 석수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왔다. 성역 공상의 상격을 정할 때도 석공의 공로가 여러 공장보다 훨씬 많다고 했다. 

수원 화성 돌은 인근 지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인근 산에서 돌을 캔 숫자를 기록해 놓았다(화성박물관 전시 자료).

수원 화성 돌은 인근 지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인근 산에서 돌을 캔 숫자를 기록해 놓았다(화성박물관 전시 자료).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훼손이 심했다. 벽돌과 목재로 된 시설은 거의 본 모습이 없어졌다. 다행히 성벽은 돌로 되어 있어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다. 화성 복원 공사를 할 때도 도움이 된 것은 성벽 돌의 공이 컸다.   

  성벽 돌을 가까이 보면 원형에 가깝다. 매끄럽게 다듬은 흔적은 없다. 겨우 돌의 표면에 정을 쫀 자국만 있다. 잔재주 없는 손길이 그대로 드러난다. 성곽 돌은 크기만 맞으면 된다. 저 돌들이 서로 맞물며 기능에 충실한 성벽이 됐다. 작은 조각들 하나하나가 전체 무늬를 이루는 모자이크처럼 투박한 돌들이 모여 작품이 된다. 거친 듯하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석수장이들이 부지런히 정을 두드린 정성이 전해 온다. 

  돌의 빛깔은 적당히 하얗다. 은은한 그 빛깔은 으스댈지도 모르고 자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다. 굴곡의 역사에도 당당히 버텨 왔다. 세찬 비바람에 의연하게 호젓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땅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성미가 겹쳐 보인다. 

  화려하고 귀해서 아름다운 것이 있지만, 성벽처럼 순박하고 소박한 것도 멋이 있다. 시간의 이끼에 거뭇거뭇해진 빛깔도 초라함이라곤 없다. 성곽 주변에 사람이 많다.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성벽 돌의 참멋 앞에서는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화성, 채석장, 숙지산, 팔달산, 정조, 서북공심돈,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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