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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장엄한 건축의 걸작, '수원화성' 답사
수원화성의 화서문 일대와 장안공원 둘러보기
2023-03-20 10:44:46최종 업데이트 : 2023-03-20 10:44:41 작성자 : 시민기자   홍명후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모습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모습


17일 필자는 우아하고 장엄한 건축의 걸작 수성화성의 화서문 일대와 장안공원을 시민과 함께 둘러보았다. 날씨가 화창한 봄날이라 화서문 일대와 장안공원에는 많은 시민이 장기, 바둑을 두거나 옹기종기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등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수원화성은 조선 시대의 개혁 군주 정조대왕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이곳은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곽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우리나라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축조 상황을 기록한 세계기록유산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1975년부터 보수·복원하였으며, 1997년에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번에 답사한 수원화성 외곽,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쪽 문이다. 시설과 구조는 네모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운 형태인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각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으로 벽돌로 쌓은 반달 모양의 옹성이 있다.
 

아름다운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전경

아름다운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모습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기 위한 구멍이 있는 낮은 담으로 쌓여 내부가 보호되도록 했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수원 화성에는 동북공심돈과 서북공심돈 두 개가 있는데, 화서문의 서북공심돈은 그 모양이 아름다워 수원시의 심벌마크로 활용되는 등 유명세를 탄다.
 

수원시의 심볼마크인 서북공심돈

수원시의 심볼마크로 활용되는 서북공심돈


수원화성이 조선시대 성곽 중 군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부분은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 축성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이 현안도와 옹성을 설치하고 치성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현안도는 '구멍을 통해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부어 적이 성벽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는 시설'을 뜻하고, 옹성은 '성문 보호와 성을 지키기 위한 이중의 방어 시설'을 말한다. 치성은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화서문의 옹성 모습

화서문의 현안도와 옹성 모습


또한 화서문에서 불과 1km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화서동 '숙지산 채석장'에서 돌을 캐어 수레로 운반하여 성곽을 축성한 그 당시의 공사 현장을 상상하면서 답사하니 실감이 더 난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은 이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화서문을 중심으로 팔달산 방면으로 화서 공원이, 장안문 방면으로 장안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고 주로 노인들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하다. 
 

장안공원에서 휴식하며 즐기는 어르신들

장안공원에서 휴식하며 즐기는 어르신들


장안공원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워 봄소식을 알린다. 또한 우아하고 장엄한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앞에는 관광객을 태운 '화성어차'가 통과하여 주위배경과 어우러져 도심 속 성곽 공원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활짝핀 노란꽃의 산수유가 봄을 느끼게 한다.

활짝핀 노란꽃의 산수유가 봄을 알린다.

수원화성 관광객을 태운 '화성어차' 모습

수원화성 관광객을 태운 '화성어차' 모습


장안공원을 산책하면서 세 개의 기념비를 접하였다. 하나는 1979년 9월 세운 박정희 대통령 휘호의 '화성복원정화기념비(華城復元淨化紀念碑)'이고, 두 개는 수원시에서 1991년 11월에 세운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와 1991년 12월에 세운 화성기적비명(華城紀蹟碑銘)'이다.

 

비문 요약 공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원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인 화산 아래에 자리했다. 옛 이름은 '물의 고을'이란 뜻으로 '맷골'로 불리었고 통일신라 이후로 '수성' 또는 '수주'라고 불리다가 '수원'으로 바뀌었다.

정조는 생부 장헌세자(사도세자) 죽음을 애통히 여겨 1789년 명당자리를 찾아 양주 배봉산의 현륭원을 화산으로 이장하게 되니 수원의 읍치와 민호를 이곳 팔달산 아래로 옮겨 새 수원이 생겼다. 또한,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으며 화성의 축성에 돌과 벽돌을 조화롭게 사용했다고 쓰여있다. 아울러 거중기와 녹로 등의 이용은 정조대왕의 뜻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축성이 빠르고 튼튼하게 이루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다.

 

"수원성(축성 200주년 1996년 전까지는 '수원성'으로 불리다가 이후 '수원화성'으로 불림)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옛 모습을 잃었고 6.25 사변 때에도 큰 손상을 입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국방, 유적 정화의 일환으로 수원성의 복원을 분부하시기에 이르러 문화공보부와 경기도가 힘을 합쳐 수원성의 옛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1979년 세운 '화성복원정화기념비'

1979년 세운 '화성복원정화기념비' 모습

수원시에서 세운 화성기적비 및 화성기적비명 모습

1991년 수원시에서 세운 화성기적비 및 화성기적비명 모습
 

또한 정조대왕의 승하로 인하여 화성기적비 건립의 뜻을 이루지 못해 수원시장(18대 이호선 시장)이 기적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정작 정조대왕의 수원화성 축성에 대한 공적비는 그간 없었기 때문에 이때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 것이다.

그리고 '화성복원정화기념비' 비문에 표시된 수원성을 수원화성으로 일부 수정한 흔적이 남은 것은 옥에 티이다.

 

장안공원에 산책 나온 60대 시민(영화동)은 "수원에서 30년째 사는데 아름다운 수원화성이 있어 자랑스럽다. 외지로 나간 자녀들도 이곳 수원화성만 한 곳이 없다면서 자주 놀러 온다."라고 말했다. 화서문 앞에서 젊은 남녀 연인을 만났다. 분당과 서울에서 따로따로 왔는데 수원에서 대학을 다닐 때 자주 오던 공원이라 추억 삼아 왔다면서 카페거리와 수원화성이 너무 좋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으로 축성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아울러 수원화성을 배경으로 수원시에서는 주간 및 야간에 펼쳐지는 화성문화제, 전통음악과 무용, 퓨전 음악 등 다채로운 행사가 4월부터 10월까지 펼쳐질 것이다. 수원시민은 물론, 타 시·도의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여 함께 즐겨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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