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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
2012-04-20 17:33:04최종 업데이트 : 2012-04-20 17:33:04 작성자 :   e수원뉴스

정조가 화성(華城)을 축성하기 시작하면서 수원에는 사람과 물자가 넘쳐났다. 지금도 그렇듯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는 지역에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활기를 불어넣는 법이다. 
"백날 땅 파 먹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화성 공사장에서 돌 하나 나르는 게 나아!"
"그러게나 말일세. 허구헌날 하늘 보고 비 내려 달라고 떼쓰는 것도 지쳤네."
게다가 당시 지구는 세계적인 기상이변으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농사에 마음을 잃고 공사장을 기웃거렸다.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1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1

하지만 정조는 백성들이 생명의 근원이 되는 농업을 간과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중 하나가 화성의 서쪽에 자리한 넓은 호수 '서호(西湖)'였다.
'이곳의 물을 백성들의 전답으로 손쉽게 끌어들인다면 농사가 한결 수월하겠구나.' 그래서 화성을 짓느라 바쁜 와중에도 따로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서호에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이름을 '축만제(祝萬提)'라 지었다. '천년만년 만석의 곡물생산을 축원하는 제방'이라는 뜻이다. 이 축만제 덕분에 수원 사람들은 풍족한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 물 걱정 안하고 농사해 보기는 반평생 처음이네."
"하늘이 물을 안 주면 인간이 물을 찾아내면 되는건데 말일세."

축만제는 단순히 농업용수만을 공급하는 곳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솟은 여기산(麗妓山) 아래 잔잔하게 펼쳐진 서호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저수지 한복판에는 인공섬을 만들고 꽃과 나무도 심었다. 

서호는 해가 질 때 가장 아름다웠다. 여기산이 날렵한 산그늘을 드리우며 저녁놀에 물든 서호로 잠겨드는 모습, 꽃과 나무로 가득 찬 인공섬에 붉은 놀이 내려앉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래서 서호낙조(西湖落照- 해지는 서호에 드리워지는 여기산 그림자)는 수원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며 긴 세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2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2

정조는 여기산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정약용이 화성을 설계했을 당시 화성이 석성(石城)이라는 것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수원에 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돌맥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별무소득이었다.

그러던 중에 팔달산과 숙지산, 그리고 여기산에서 돌맥이 발견된 것이다. 정조는 크게 기뻐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이렇게 얻은 돌들마저도 아버지 사도세자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여기산을 낀 이 저수지에 축만제를 지을 때 정조는 묵묵히 돌을 캐어 날라 주고 석성을 쌓아 준 백성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축만제는 그런 고마운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산(麗妓山)'이라는 이름이 참 재미있다. '아름다운 기생'! 수원 사람들은 이 산의 자태가 여성처럼 요염하고 아름다워 여기산(麗妓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왕이 만든 제방 곁에 있기에는 민망한 산 이름이 아닐까? 게다가 평생 여자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정조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사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여기산(麗妓山)이 아니었다. 화성 축성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이 산은 여기산(如岐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기(岐)'는  '갈림길'을 의미한다. '날아가는 모양'을 말한다고 한다. 물론 이 이름을 정조가 지었을 리야 없지만 왠지 산 이름에서도 정조 치세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우리는 정조를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부른다. 발달된 신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정조 때였고, 신분전복과 다양한 사상의 개화와 충돌이 활발하게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그러므로 정조시대는 조선역사의 갈림길이었다. 지금까지 밟아오던 길로 묵묵히 걸어갈지, 새로 나타난 길로 향할지를 선택하는 기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조가 평생 안고 살았던 고민이기도 했다.

정조 치세기는 유난히 큰 변화가 많았다.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실학이 꽃피며 성리학에 회의를 느끼는 지식인들이 많아진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이전의 시대가 '또박또박 걸어가는 시대'였다면 정조의 시대는 '날아가는 시대'였다. 빛처럼 빠르게, 격랑처럼 거칠게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였다. 

아무튼 이 축만제를 기점으로 수원은 한국농업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훗날 일제강점기 때 권업모범장이 이 근처에 자리 잡은 것부터 시작해서 해방 후에는 농업진흥청이 종자개량과 농업기술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해 왔다. 보릿고개가 존재하던 시절, 통일벼를 만들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하고, 생활이 나아진 후에는 오대미를 만들어 한국 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것도 농촌진흥청이었다. 

예부터 서호의 잉어는 빛깔과 맛이 좋아 임금에게 진상되었다. 정조의 수라상에도 서호의 잉어가 오르지 않았을까? 워낙 검소한 임금이라 자주야 먹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서호의 잉어를 바라보며 수원을 한 번 더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3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3

이제 정조도 가고, 그와 함께 축만제를 쌓았던 백성들도 가고 없다. 서호를 가로지르는 다리 축만교 역시 최근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서호에 서서 수원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낙조를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 '날아가듯' 거칠고 빠른 시대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던 명민한 군주가 떠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난 후 조선역사의 낙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있었기에 낙조는 새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미륵을, 메시아를 기다리듯 어쩌면 우리는 오늘날 그의 부활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졌던 우리의 어진 임금 정조를!

서호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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