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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정신 담긴 곳-성신사와 신풍루
2012-01-20 14:16:23최종 업데이트 : 2012-01-20 14:16:23 작성자 :   e수원뉴스

성신사

수원 화성(華城)이 완공되어 가던 즈음인 1796년 가을, 정조는 사당을 하나 지으라는 어명을 내렸다. 사당의 이름은 성신사(城神祠). 말 그대로 '성을 지키는 신의 사당'이다. 1796년 7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달 만에 상량을 하고 1달 뒤에 완공되었다. 

"우리 고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
정조가 직접 지어 준 이 축문에는 수원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현실주의자였던 정조는 기복신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성신사는 기복신앙의 측면이 아니라 성곽의 신을 모신 것으로 도성의 종묘와 사직단의 성격으로 만든 것이다.

사당이 완공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어 정면 칸에 봉안하고 매년 맹삭(孟朔: 계절을 시작하는 달의 초하룻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대대적으로 훼손당했고, 해방 후에도 복원되지 못하다가 1971년에는 이 자리에 강감찬 동상을 세웠다. 그러다가 민간단체인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의 복원운동이 일어나면서 2008년 4월에 이르러서야 성신사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9년에 중건되었다. 
편액은 서예가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 선생의 작품이다.
성신사 자리에 있던 강감찬 장군 동상은 복원으로 인해 광교공원으로 옮겨졌다. 

정조대왕 정신 담긴 곳-성신사와 신풍루 _1
정조대왕 정신 담긴 곳-성신사와 신풍루 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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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정신 담긴 곳-성신사와 신풍루 _2
정조대왕 정신 담긴 곳-성신사와 신풍루 _2


신풍루

화성행궁에서 혜경궁의 진찬연이 열린 다음날.
행궁으로 향하는 팔달문길이 사람들로 메워졌다.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한 진찬연을 열던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인파 속에는 유난히 허름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때 국물이 흐르는 얼굴에 누더기를 입은 사람들, 지팡이를 짚은 노인, 소복을 입은 과부, 영양실조로 허옇게 버짐이 핀 아이들이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褸)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수원에 사는 과부, 노인, 고아를 비롯한 빈민들이었다. 

"엄마! 정말로 신풍루에 가면 죽을 주나요?"
"그래! 죽 뿐이냐? 전하께서 쌀과 소금도 주신다는구나. 어서 가자, 어서."
과연 신풍루 앞에는 커다란 솥이 여러 개 걸려 있었고 그 안에서 구수한 냄새가 술술 퍼져 나오고 있었다. 

"자자, 줄을 서시오."
관원들이 정중하게 말하며 줄을 세웠다. 그리고 차례대로 죽과 쌀을 나눠 주었다.
이때 죽을 먹던 한 소년이 신풍루 위 누각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 저기 용 문양이 들어 있는 군복을 입고 서 있는 분은 누군가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양 어깨와 가슴에 번쩍번쩍 빛나는 용문양이 놓인 군복 차림의 사내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학식이 있어 보이는 한 노인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아니, 뭣들 하는 게냐? 전하시다. 어서 전하께 예를 표해야지."
"전하? 나라님이시라고?"
"그래. 이 쌀과 죽을 주시는 분이 전하시란 말이다."
"아이고, 전하,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절을 올렸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눈가는 촉촉이 젖어들었다. 
'아버지! 이렇게 한 번씩 쌀과 죽을 나눠 주는 것으로 백성들의 간난신고가 단번에 해결될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먼저 시작해 보려 합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늦은 시간까지 인파는 끝없이 몰려왔다. 정조는 꼼짝도 않고 신풍루에 앉아 백성들이 죽을 먹고 쌀을 받아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병정더러 죽을 한 그릇 가져오게 했다. 죽을 한 술 먹어 본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하게 잘 끓였구나. 혹시라도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병정들이 묽은 죽을 끓여서 백성들에게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늦게 오는 백성들이 혹여 식은 죽을 먹는 일이 없도록 따뜻하게 데우도록 하라."

그는 달빛에 비친 '신풍루(新豊樓)' 현판을 바라보았다. 정조 자신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었다. 
"아버지! 이 이름처럼 수원을 새롭고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더 이상 신풍루 앞에 솥을 걸어 죽과 쌀을 나눠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유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정조대왕 정신 담긴 곳-성신사와 신풍루 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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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신풍루 앞에서 죽과 쌀과 소금을 받아 간 사람은 고아 539명, 빈민 4813명인데 이는 당시 수원 인구의 10분의 1에 달했다. 이날 나눠 준 쌀은 모두 368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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