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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
2011-12-09 15:27:08최종 업데이트 : 2011-12-09 15:27:08 작성자 :   e수원뉴스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1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1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다. 
웅장한 몸체에 누각을 2층으로 쌓아올린 장안문의 백미는 우진각 지붕이다. 우진각 지붕은 조선시대에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만 만드는 지붕이었다. 

장안문 우진각 지붕 끝에는 잡상들이 서 있다. 흔히 악귀들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의 용도로 설치했다고 하는데 대궐의 중요한 장소가 아니면 이 잡상을 장식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임금이 머무는 곳에만 존재하는 우진각지붕과 잡상들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정조가 이 장안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1794년 1월 4일. 정조는 팔달산에 올랐다. 수원 시가지를 한눈에 보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서면 화성을 쌓는 과정도 손쉽게 살펴볼 수 있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공사현장을 내려다보던 정조는 화성의 북문이 지어질 곳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커다란 깃발들이 민가들이 모여있는 지역에 줄줄이 서 있는 것이다. 정조가 연유를 묻자 현장 책임자가 대답했다.

"저 깃발은 앞으로 화성북문이 들어설 구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민가들도 다 구역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북문을 짓게 되면 저 민가의 백성들은 어찌 되느냐?"
"이주해야 하옵니다."

정조는 얼굴이 굳었다. 그곳에 모여 사는 백성들은 이미 화성행궁 건립 때문에 살던 터를 버리고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위해 한 번 고향을 떠나 준 사람들인데 그런 슬픔을 두 번 겪게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북문의 위치를 옮겨지어라."

성의 문은 군사적 전략적 요구에 따라 그 위치와 구조가 결정된다. 그러나 정조는 그 어떤 것보다 백성들의 행복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장안문이라는 이름도 정조가 지은 것이다. 화성 북문의 이름이 장안문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조정 대신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2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2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3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3

"무엇이? 자... 장안문! 장안문이라고?"
"어쩌자고 그 이름을!"

장안은 중국 당나라의 수도 이름이었는데 이후로는 중원의 황제가 머무는 수도를 부르는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안'의 이름을 화성 북문에 붙인 것이다. 이것은 당시 중국을 받들던 사대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안 그래도 수상하다 했습니다. 사도세자 묘소를 옮긴 후에 거기로 통하는 길을 황도(皇道)라고 부르시고, 거기로 건너가는 다리를 황교(黃橋)라고 부르시고, 천세가 아닌 만세를 말씀하실 때에 이미 눈치 채고는 있었사옵니다만."

대저 만(萬)은 황제의 숫자였고 황(黃)은 황제의 색깔이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릴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수원에 들어선 정조 일행이 제일 먼저 만난 화성의 문이 바로 이 장안문이었다. 세찬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수원부사 조심태는 일찌감치 군사들을 이끌고 장안문 앞에 서서 정조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원 백성들은 임금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모여들었다.

이윽고 거친 빗줄기를 헤치고 화려한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사람들 입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황찬란하게 빛이 나는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잠깐, 저게 뭐야? 화... 황금이잖아."
"세상에! 황금 갑옷이야!"

그랬다. 그것은 황금 갑옷을 입은 조선의 임금 정조였다. 대저 조선 임금의 공식 옷차림은 곤룡포였다. 간혹 먼 거리를 가거나 군사적인 행사에 참석할 때는 융복을 입었다.  그러나 갑옷을, 그것도 황금갑옷을 입은 임금은 아직까지 없었다.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4
장엄하다! 황금갑옷 입은 왕이 입성하던 장안문_4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황금갑옷 차림으로 나타난 정조가 '장안문(長安門)'을 통과하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왕권을 강화시켜 나라의 기틀을 탄탄히 다지겠다는 굳건한 정조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조의 그런 모습은 백성들에게 큰 희망과 자부심을 주었다. 그때 받은 인상 때문인지 지금도 장안문은 수원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끔씩 장안문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안문 역시 부침 많은 근현대사의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당시 수원은 중공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중공군이 장안문 홍예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아군 폭격기가 날아와 조준 사격을 가했다.  그 바람에 장안문도 폭격을 맞아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을 1975년에 장안문을 재건립하고, 인간문화재인 대목수 신응수가 도편을 맡아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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