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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
2011-12-16 16:25:34최종 업데이트 : 2011-12-16 16:25:34 작성자 :   e수원뉴스

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_3
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_3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원은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유경(柳京)! '버드나무가 많은 수도'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 이름처럼 수원에는 버드나무가 많다.

정조는 수원을 풍요로운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물줄기들을 모아 저수지를 파고, 국영농장을 지었다. 이때 그가 천변에 심을 나무로 선택한 것이 버드나무다. 버드나무 뿌리가 제방을 튼튼하게 잡아 주고 물을 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특히 유명한 것이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화성행궁과 팔달문 시장 앞을 흘러가는 수원천의 버드나무들이다. 하도 버드나무가 많고 아름다워서 수원사람들은 이 천을 '버드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형 특성상 버드내의 물은 계절에 따라 수량이 급격하게 변해 자칫 범람의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적들이 물줄기를 타고 침입해 올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정조는 화성의 북쪽과 남쪽에 수문을 설치했는데 화홍문(華虹門)은 북수문이다. 

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_1
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_1

화홍문은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라는 뜻이다. 크고 작은 돌덩어리를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이자 수문으로 만들었다. 
화홍문은 또한 성곽 안쪽 마을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수원천 동쪽과 서쪽을 이어 성 안 백성들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러나 역시 화홍문은 성곽 본연의 임무인 철저한 방어기능을 수행했다. 누각 양 옆을 화포를 설치한 대포 구멍을 만들고 그 위로 높은 벽돌담을 만들어 총을 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백미는 바닥이다. 7칸의 무지개문 아래로 물줄기가 계단을 통해 내려가고, 그 아래에는 넓은 돌을 깔아 평평하게 너른 공간이 있다. 

이 넓은 돌, 즉 박석은 조선 시대 국왕이 조회를 여는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같은 정전 앞과, 국왕이 돌아가시고 난 뒤 국왕의 영혼이 머무는 왕릉의 정자각 앞에만 설치된다. 
이러한 박석이 화홍문 앞 버드내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화홍문은 1906년 대한제국 시대에 국폐(國幣)를 만들 때 화도안으로 들어갔다.

화홍문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햇빛이 반사되면 오색 무지개가 피어오르곤 했다. 이름처럼 무지개가 피어나는 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홍문에서 쏟아지는 수원천 물줄기를 보는 것'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화홍문과 수원천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화홍문 공사를 끝낸 후 정조는 화홍문에 누각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선언을 했다.

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_2
아름다운 무지개 문, 대동세상 꿈꾸다_2

"수원의 모든 누각은 양반, 평민, 천민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신분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이곳에서는 평등하니 백성들은 마음 놓고 사용하라."

그러나 정조가 화성을 완공한 지 126년째 되던 1922년 대홍수가 나면서 화홍문은 파괴되고 말았다. 식민지의 수문이 무너진 것을 일제가 보수해 줄 리가 없었다. 

수원 사람들은 스스로 '수원명소보존회'를 결성하고 1925년 지역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부를 받아 화홍문을 복원했다. 그리고 1932년에는 드디어 화홍문 누각도 완공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문화유산을 복원한 최초의 사례다. 

신분과 지위의 구분 없이 다양한 백성들이 둘러앉아 화홍문 물줄기에서 피어오르던 무지개를 바라보던 누각! 그 누각과 화홍문을 복원한 것은 단순한 문화재 복원이 아니다. 신분차별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정조가 필생의 과업으로 붙잡고 있었던 대동세상을 향한 꿈을 복원한 것이다.

화홍문에는 오늘도 힘찬 물줄기가 흐르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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