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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
2011-12-30 17:22:35최종 업데이트 : 2011-12-30 17:22:35 작성자 :   e수원뉴스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1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1

정조는 세손시절 정적들의 손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훗날 그는 그때를 '옷띠를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잠든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조선 역사는 내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 점철되었고 그 싸움은 대부분 신권의 승리로 끝났다. 기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이 꿈꾸는 개혁도 강한 왕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현하기 어렵다.

물론 왕의 독재를 막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양반관리들이 임금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거나 이간질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처럼 언로가 널리 열려 있지도 않은 당시에는 이것이 매우 치명적인 요소였다.

"왕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왕권이 강해야 한다.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武)다!"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2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2

그것이 군사독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임금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그래서 만든 것이 정조의 호위부대 장용영이었다.

이 장용영의 중심이 화성에 있는 장용영 외영이었다. 
이 장용영 외영을 위해 강력한 군사 기반을 조성하는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이 바로 연무대와 그 일대의 훈련장이다. 1795년 7월15일 터 닦기 공사에 들어가 26일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고 8월 10일 상량 이후 보름 뒤인 8월 25일 모든 공사를 마쳤다. 

정조는 연무대를 조선 최고의 군사훈련장으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 이곳에서 훈련하는 군사들을 최고 정예로 선발했다. 훈련도감 등 오군영에 있는 최고 정예들을 뽑아 화성의 장용영 의영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오군영을 겨냥한 것이었다. 오군영은 사실상 노론의 실질적 무력 집합체였다. 정조는 장용영을 강화시켜 오군영을 누르도록 했다. 그래서 왕권에 도전하는 불측한 싹을 제거하고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연무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팔달산과 마주 대하고 있는 선암산의 가장 높은 곳이다. 선암산은 팔달산이나 광교산처럼 산 모양새를 갖춘 곳이 아니라 평지 위에 낮지도 높지도 않게 알맞게 솟아오른 동산이다.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면서 풍수지리를 고려해 서장대와 동장대를 만들면서 팔달산과 선암산으로 마주보게 하고 방화수류정이 있는 용암(龍巖용바위)과 남수문 아래 구암(龜巖거북바위)을 마주보게 했다. 화성에서의 전투지휘는 팔달산 정상에서 하고 군사훈련은 팔달산과 마주한 선암산 자락 연무대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풍수지리와 사회적 관계를 철저하게 고려한 배치였다.

연무대는 조선시대 목조로 건립된 군사건축물 가운데 가장 웅장한 건축물의 하나다. 가장 웅장한 것이 국보로 지정된 전남 여수의 진남관(鎭南館)과 통영의 세병관(洗兵館)이라고 한다면 연무대는 그 다음에 해당되는 웅장한 건물이다.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3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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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4
화성을 조선 최고의 강력한 군사도시로 만들자_4

방화수류정은 드물게 한국전쟁 때 포격 피해를 입지 않고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양에서 정예군사를 양성하던 훈련원이 있던 용산과 동대문 일대는 옛 유적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방화수류정만은 그대로 남아 정조의 뜻을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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