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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
2012-01-13 18:41:38최종 업데이트 : 2012-01-13 18:41:3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맨 처음 정조가 수원에 도착했을 때 정조의 눈에 들어온 것이 팔달산이었다. 호쾌하게 수원을 가로지르는 산줄기가 보기 좋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나면 반드시 그는 이곳 팔달산 정상에 올라 화성 공사 현장을 살펴보곤 했다.

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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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_2
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_2

한번은 민가가 늘어선 동네를 커다란 깃발들이 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연유를 물어보니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짓기 위해 철거해야 하는 구역을 표시해 놓은 것이라 했다. 정조는 진노했다. 

"아무리 성이 중하다지만 저렇게 민가 한가운데 문을 내기 위해 백성들더러 삶의 터전을 옮기라고 할 수 없다. 차라리 문을 옮겨 짓도록 하라."

사실 화성 축성 과정 중에 정조는 여러 차례 분노를 표했다. 공사기일이나 자재비에 대한 허위보고가 올라오기도 했고, 현장에서 쏟아지는 백성들의 원망을 관리들이 조직적으로 은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에 오면 반드시 팔달산에 올라 직접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하나하나 지시를 내렸다. 임금과 백성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무리의 방해를 걷어내고 온전히 밝은 눈과 열린 마음으로 백성들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팔달산의 원래 이름은 탑산(塔山)이었다.
수원 시내를 힘차게 가로지르는 그 산을 바라보며 정조는 '이고(李皐)'를 떠올렸다. 대대로 수원에서 살아온 토박이 가문 여주 이 씨인 그는 고려 말기에 문관생활을 하다가 공민왕 때 정계를 은퇴하고 탑산에 은거했다. 

어지러운 고려 말, 공민왕은 현명한 노대신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탑산에 은거한 이고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즐겁습니다."라고.

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_4
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_4

'사통팔달이라....'
정조는 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사통팔달이라는 말답게 사방이 탁 트여 시야가 시원하다. 사방팔방 뻗어 달려가는 산세의 움직임이 힘차고 역동적이다. 자연스럽게 호연지기가 일어났다.

이고가 이 산에 은거하던 무렵 고려 정국은 더없이 혼미했다. 결국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끄는 신진세력에 의해 고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고는 그 모든 소식을 이 산에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얼마 후, 이번에는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보낸 사신이었다. 조정에 출사해 달라는 태조의 부탁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고는 거절했다. 
태조는 다시 사람을 보냈다. 이번에는 화공(畵工)이었다. 인재를 얻을 수 없다면 그 인재가 은거하는 산의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고 한 태조의 부탁 때문이었다.

화공이 그려 간 탑산의 모습을 보고 태조는 이렇게 말했다.
"과연 이고 자신의 말대로 사통팔달한 산이로구나."

그 뒤부터 탑산은 '팔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훗날 이고는 어찌 되었을까? 끝끝내 팔달산에 은거했을까? 아니면 태조의 청을 받아들여 출사했을까? 이고는 후자를 택했다. 대쪽 같은 간관(諫官)이 되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백성들을 보호했다.  

정조는 팔달산을 거닐며 이고와 태조 이성계를 생각했다. 원칙적으로는 정적(政敵)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 그러나 이고는 태조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고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고를 가질 수 없다면 이고가 머무는 산의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고 한 태조의 진심이 이고의 마음을 움직인 게 아닐까?

'나는 그때의 태조 할아버지와 같은 입장이다. 아직 안정되지 못한 왕권. 아직은 수적으로 열세인 내 동지들. 더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더 큰 힘을 키워야 한다. 어떻게? 바로, '진심'을 가지고!"

팔달산 아래 펼쳐진 수원을 바라보며 정조는 다짐했다. 진심을 가지고 수원 백성들에게 다가가겠노라고. 그리하여 수원을 사통팔달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놓치지 마세요! 
정조가 수원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팔달산 정상을 내려오다 보면 산중턱에서 공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팔달공원'이다. 배드민턴장·농구장·게이트볼장·족구장 등의 시민체육공간과 총 1,580m의 조깅·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수원 시민들의 생활체육마당으로 애용되고 있다.

또한 팔달공원에서는 수원의 역사도 공부할 수 있다. 우선, 사적 제3호로 지정된 화성 나들이의 출발지이다.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를 정점으로, 화성 성벽 1.2km가 이어져 있으며 길이 3.2km의 팔달산회주도로도 있다. 

'3·1독립운동기념탑'은 1919년 수원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을 기리는 탑이다. 수원이 낳은 음악가 홍난파의 노래비도 있다. 노래비에는 '고향의 봄' 악보가 새겨져 있는데 종종 그 앞에서 악보를 보며 노래를 읊조리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

산아래 펼쳐진 수원바라보며 백성 생각한 왕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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