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기고]‘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문화재 지정 해제하라고?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2013-06-17 15:56:29최종 업데이트 : 2013-06-17 15:56:2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기고]'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문화재 지정 해제하라고?_1
광교암 원경

한 인터넷 블로그에서 광교산에 있는 김준룡(金俊龍, 1586~1642) 전승지 및 비의 내용을 문제 삼고 나서면서 문화재 지정 해제를 경기도지사에게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그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조선시대 영의정이 새기라고 명한 비문으로는 형태가 너무 조잡하다. 2) 일제강점기 때 사용된 단어(丙子淸亂)를 조선시대 영의정 채제공이 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3) 1977년 3월 최초로 발견했다고 하지만 이보다 3년 전인 1974년 『경향신문』에 이미 이 비와 관련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4) 『경향신문』 기사의 비문은 현재 것과 다르다. 따라서 후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어서 문화재 지정 해제를 해달라는 주장이다. 

과연 이는 문화재 지정 해제를 주장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광교산 7부 능선의 광교암에는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룡 장군의 전승에 관한 사실을 새긴 글씨가 있다. 정조 때 화성 축성의 책임자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광교산 승첩과 호항골의 전설을 듣고 그 사실을 암벽에 새기게 했다고 전한다. 

글씨는 암벽을 갈아 비액을 만들고 세로로 '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큰 글씨고 새겼고, 그 좌우에 조금 작은 글씨로 '丙子淸亂公提湖南兵'과 '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써 놓은 것이다. 이는 '충양공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라는 것과 함께 '병자호란 때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청나라 3명의 대장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사적은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8호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비'로 지정된 것이다.   

조선의 자부심 – 광교산

한남정맥의 주산인 광교산은 경기남부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수원시민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수원의 중심부를 흐르는 수원천의 발원지로서 광교산은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역사문화적으로 광교산은 고려시대 2명의 국사(國師)가 배출된 자랑스런 법산(法山)이기도 하다. 용인쪽 서봉사 현오국사와 수원쪽 창성사 진각국사가 그들이다. 하나의 산에서 두 명의 국사가 배출된 것도 광교산이 유일한 경우라 하겠다. 

조선시대 국난으로 임진왜란은 7년 동안 나라가 전쟁터로 쑥밭이었지만 승리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3개월 동안 진행된 병자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병자호란 때 김준룡 장군의 광교산 전투는 조선군 최초의 승첩이었고, 유림(柳琳, 1581~1643) 장군의 강원도 김화(金化) 전투와 함께 둘 밖에 없는 승리였다. 이에 광교산 승첩은 수원사람들의 자랑이 되었고, 이러한 수원사람들 덕에 1791년(정조 15) 1월 22일 부사직 신기경(愼基慶)은 수원의 위상을 제고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들어 말하더라도 우성전(禹性傳)이 의를 부르짖어 공훈을 세우고, 광교산에서 오랑캐를 섬멸하고 공을 세운 것은 모두 수원부의 뛰어난 옛 자취이니 기리고 장려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변사에서도 "광교산에서 김준룡이 오랑캐를 섬멸한 일은 야승(野乘)에 환히 드러나 있고 어른들이 아직 전하고 있으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야 한다고 상주하고 있다. 

이에 이듬해인 1792년 9월 29일 제말·공서린·이의정·황경원·조영국과  함께 김준룡은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준룡장군의 승첩에 대한 기억은 수원 사람들에게 여러 대에 걸쳐 전승되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현창됨으로써 광교산은 수원의 진산을 넘어 조선의 자부심이 되었다.  

[기고]'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문화재 지정 해제하라고?_2
전승지 안내판과 새김글씨

호남 근왕병과 김준룡 장군의 광교산 전투

1636년 12월 한 겨울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기마병들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각도 감사·병사에게 조속히 근왕병을 이끌고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2월 20일 전라감사 이시방은 근왕병 6천명을 모집하여 12월 29일 전라병사 김준룡과 함께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1637년 1월 1일 충청도 직산에 도착하여 남한산성으로 장계를 올렸고, 이튿날 경기도 양지에 도착하였다. 1월 4일 김준룡은 선봉장으로 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광교산에 진출하였다. 

청나라 적장 양굴리는 용인과 경계지역인 광주 험천현에서 충청도 근왕병과 전투에서 승리한 뒤 광교산으로 향하였다. 1월 5일 양굴리는 5천명의 대군으로 광교산의 김준룡 부대를 공격하였다. 김준룡의 조선군은 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에 승전 소식을 남한산성에 알렸다.
이원익(李源益, 1792~1854)의 『동사략(東史約)』에는 광교산 전투에서 김준룡 부대는 3번 싸워 3번 이기면서 피로 골짜기를 물들이고 또 적장 8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남한산성은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어 있었을 때였다. 구원병 소식이 잇따르면서 성 안에서는 잠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특히 광교산 전투가 유명한 것은 적장 양굴리를 사살하였다는 점이다. 김준룡 장군의 휘하에 있던 전북 고창 출신의 박의(朴義)가 포를 쏘아 사살하였던 것이다. 양굴리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매부이자 후금 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로 후금이 건국될 때부터 크고 작은 숱한 전투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운 자였다. 각종 자료에 양고리(楊古利, 楊古里), 백양고라(白羊高羅), 백양고(白羊高), 백양회(白羊會), 백양(白羊)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편 김준룡 장군은 광교산 전투 이후 화살과 양식이 떨어져 다시 적과 싸우면 위험할 것이라 판단하고 군사를 수원으로 퇴진(退陣)시켰다. 허목(許穆)이 지은 「김준룡 신도비(金俊龍神道碑)」에 따르면 광교산 전투를 승리하고 난 뒤 수원으로 행군 도중 밤이 되었는데 놀란 군사들이 소란을 일으켜 크게 외치기를 "우리가 주장(主將)을 위하여 이미 힘써 싸워 이겼으나 갑자기 정변이 있어 우리가 죽는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며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김준룡 장군은 휘하의 군사 수백 명과 더불어 수원에 이르러 병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거두어 후사를 도모코자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때 양지에 머물던 전라감사 이시방을 비롯한 호남 근왕병은 김준룡 부대의 퇴진을 패배로 잘못 알고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공주까지 후퇴하였다. 남한산성에서 근왕병을 목이 메도록 기다리던 조정은 1월 9일 전라감사 이시방에게 김준룡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에서 궤산하게 된 죄를 묻게 되고, 김준룡 장군도 2월 11일 국문 정죄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광교산 전투의 승리가 참작되어 1달 만인 3월 26일 사면되었고, 이후 어영중군(御營中軍)·김해부사·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광교산 김준룡 장군 전승지와 전승비

현재 광교산 산마루에 가까운 바위에 김준룡 전승 사실이 새겨진 글귀가 남아 있다.  『수원군읍지』 (1899) 고적조의 '광교암(光敎巖)' 설명에 김준룡의 광교산 승첩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즉 광교산 전투가 광교암 일대 호항골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비문 내용과 새겨 넣은 사실이 없어 아쉽지만 전승 사실을 새긴 암반이 '광교암'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비문은 언제 누가 새긴 것일까? 

비문의 '忠襄公'을 통해 1792년 시호 충양공 추증 이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1795년 화성축성이 이루어지면서 수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조선시대 가장 수치스런 병자호란에 대한 극복과정에서 김준룡 장군의 광교산 승첩에 대한 의식 고취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화성축성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준룡장군 전승 사실을 새기라고 했다는 구전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 문헌적 자료가 없는 상태라서 추후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조선시대 영의정이 새기라고 명한 비문으로는 형태가 너무 조잡하다는 주장이다.
광교산 산마루에서 살짝 내려 서 있는 광교암의 비문은 현재적 시각에서 보면 조잡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전혀 없는 일부러 가서 봐야 하는 후미진 곳이다. 더욱이 가파른 지형의 바위를 일부러 갈아서 글씨를 새긴 것이다. 오히려 상당한 공력이 들어 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일제강점기 때 사용된 단어를 조선시대 영의정 채제공이 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일반적인 병자호란의 용례가 아니라 병자청란(丙子淸亂)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병자청란을 일제시대 용어로 단정하고 있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1636년 병자년에 일어난 오랑캐의 난리라는 의미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불렀다. 같은 의미로 '병자노란(丙子虜亂)'으로 쓰기도 했는데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용례이다. 

많지는 않지만 '병자청란(丙子淸亂)'이라는 용어도 간간히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당시 생존했던 인물인 유혁연(柳赫然, 1616년~1680)의  『야당유고(野堂遺稿)』가 대표적이다. 손자 유득장(柳得章, 1686~1730)이 할아버지 유혁연의 연대기를 정리하면서 병자호란 당시 상황을 "丙子淸亂, 公與湖西士民, 避亂于海島"라 적고 있다. 이는 "병자청란으로 공이 호서의 사민들과 더불어 섬으로 피난하였다"는 내용이다. 

유득장은 숙종~영조 때 활동했던 인물이다. 유혁연의 행장 뒤에는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유혁현의 시장(諡狀)이 실려 있다. 따라서 '병자청란'의 용어는 이 당시 사용되었던 용례임을 알 수 있고, 유득장이 쓴 병자청란이라는 용어를 채제공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병자청란이 일제시대 만들어진 용어라는 것은 또 다른 억측에 불과하다. 1909년 7월 23일 『황성신문』 기사에도 '丙子淸亂과 壬辰日亂'이라는 낯설지만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한 또 다른 표현방식이 쓰였다.

[기고]'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문화재 지정 해제하라고?_3
새김글씨

사료 비판이 없는 신문기사에 대한 오독과 맹신

가장 위험한 것은  『경향신문』 연재 「길」(1974. 11. 2)의 기사의 내용을 맹신하여 현재 것과 다르니 후대 누군가가 지금의 비문으로 새겨 넣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주장하는 바대로 신문기사는 '金俊龍戰勝也提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으로 '김준룡 장군이 오랑캐의 남병을 근왕병으로 하여 이곳에 와서 청나라 3대장을 죽였다'는 황당한 내용이 된다.
그러면서도 주장하는 이는 이조차 '金俊龍戰勝也提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오독하고 있다. 

신문기사는 기자의 잘못된 견해와 오탈자를 전제해야 한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신문기사 가운데 '창성사라는 절터에는 병자호란 때 청군을 크게 섬멸했다는 전승탑으로 그 이름은 의성탑(義聖塔)이다.'라는 기술이 있다. 또한 김준룡장군 전승 사실을 새긴 큰 바위를 '의성대(義聖臺)'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의성탑과 의성대의 존재는 이 신문기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조선시대 김준룡 장군의 전승을 기념하여 의성탑을 세웠다면 이를 확인해주는 문헌기록과 구전이 전혀 없을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의성탑과 의성대에 대한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과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광교산에는 고려시대 사찰인 창성사에는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과 '탑비'가 있었다.  창성사는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 전투 때에 진각국사 대각원조탑과 창성사가 불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탑과 의성대에 대한 가상의 존재와 오탈자로 이루어진 신문기사를 믿고 문화재 지정 해제를 요청하는 것은 넌센스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근거인  『동아일보』(1977. 3. 17) 신문기사에도 김준룡 장군이 '적장 3명을 격살하고 자신도 전사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적고 있다. 김준룡 장군이 광교산전투에서 전사한 사실이 없다. 신문기사를 이용하려면 사료비판을 통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만일 '丙子淸亂'을 근거로 후대 누군가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려면 그러한 행위의 충분한 이유와 당위성 및 주도 인물이 밝혀져야 한다. 
맥락과 연관성도 없이 신문기사와 다르다 하여 곧바로 누군가가 후대 조작한 것이라 생각하는 발상도 문제지만 그러한 억측을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인 양 인터넷에 유포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문화재와 관련한 내용은 신중해야 한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아마추어적 맹목과 단순한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지정 문화재는 국가적 자존과 더불어 민족이 향유하는 문화유산인 때문이다. 

한편 조선후기 국가적 자존심을 고취하는 국난극복의 위대한 장소와 인물을 현창하는 작업은 정조 때 최고조를 이루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진행된 광교산 사적은 이후 국운이 쇠락한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존재가 잊힌 것이다. 물론 광교동 사람들이야 그곳을 알고 있었겠지만 중요성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1970년대 언론에 알려지게 되면서 비로소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 문화유산은 지역민의 사랑과 인식에 따라 그 의미와 내용이 재해석되고 다르게 표상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광교산 승첩과 관련한 '김준룡장군 전승지와 비'는 정조 때와 일제시대, 그리고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고 기념하여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적인 셈이다.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