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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명절 후유증, 따듯한 말 한마디면
2014-02-01 10:24:24최종 업데이트 : 2014-02-01 10:24:24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형님, 동서 고생하셨어요. 어머님 이제 푹 잠 좀 주무세요. 피곤하실 텐데!"
5년 전 귀천하신 시아버님 기일과 우리네 최대명절 설날과의 차이는 딱 3일, 그러나 설과 기일의 음식상을 한꺼번에 마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주일 간 며느리들은 육신의 피곤함을 견뎌내야만 했다. 

3일전 아버님 제사를 치르고 설날 이른 아침에 다시모여 차례상과 점심식사까지 마친 후 오후가 되어 집으로 향하는 며느리는 차에 타자마자 삭신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힘에 부친지도 모르고 닦고 또 닦고 하는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구들장 펄펄 끓는 방에서 며칠간 두러 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들과 남편에겐 표현을 자제하며 보금자리로 들어섰다.

 

아내의 명절 후유증, 따듯한 말 한마디면_1
2014년도 화내는 일 없이 신나게 살기로 아내와 약속하세요

시어머님 고향은 운산, 그리하여 운산댁으로 불리는 그녀에겐 아들만 4형제, 며느리들 역시나 4명이다. 그렇지만 세상사란 꼭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전저런 일이 불가피하게 생기기 마련인지라 올해도 어김없이 며느리 한명이 빠지고 3명만 모여 제사상과 설날 음식 장만을 해냈다. 
낼모레면 팔순이 되시는 시어머님 서운하지 않게 당신의 남편 제사상을 충실히 차려드리고 조상님의 차례상 역시도 허투루 준비하면 안되기에 고명 하나, 떡살하나 소중히 다뤘다. 

성심성의를 다하니 주름진 시어머님 얼굴이 맑은 햇살을 받은 듯 활짝 피어났다. 심정 같아선 몇날 며칠 곁에서 시중을 들고 싶지만 내일 당직이라는 남편의 말에 따뜻한 만남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시각은 오후 4시, 밥솥의 밥을 보니 딱 2인분이다. 잠시 후면 또다시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저녁상을 준비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몸의 피곤함이 더해져 왔다. 
'어~ 혹시나 나도 갱년기?'란 의구심과 함께 지난해부터 갱년기란 확진을 받고 고생하고 계신 큰형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내의 명절 후유증, 따듯한 말 한마디면_3
추운 겨울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옵니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지요

"동서! 한의사가 그러는데 갱년기는 폐경기 전후 10년 간 이라고 하데. 증세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니 동서도 지금부터 몸의 징후를 잘 감지해야 나처럼 아픈 증세를 피할 수 있다네! 나의 호시절도 끝났어. 영화관을 갈 수가 있나, 마음대로 차를 탈 수가 있나. 이젠 여행도 힘들고 사람 많은 곳에는 아예 가지도 못하네. 질식할 것 같거든..."
아뿔싸, 지난해부터 자주 넘어지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만 나도 드디어 갱년기 증상이 시작된 것인가. 형님이 자주 꺼낸 '갱년기 증세'를 귓등으로 들었던 어제와는 달리 이제야 절대음감으로 들려왔다.

'아이고~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주부의 본분에 따라 '저녁밥을 짓기 위한 쌀을 씻어나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지만 피곤함이 몰려오면서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꿈속인지 현실인지 모를 왁자한 소리가 머리맡까지 다가왔다.
"아빠! 밥이 조금밖에 없어요. 어떡해요. 라면도 하나 밖에 없는데....오늘따라 햇반도 없어요."
"그냥 나물 넣고 비빔밥 해먹자. 그러면 어느 정도 밥이 모자라지 않으니..."
"야! 너 밥 안 먹어! 아까는 배고프다고 했잖아~"
"모자란다고 했잖아. 아빠랑 둘이서 먹어. 난 안 먹을 테야!"

소리가 점점 명확하게 들러오는 것을 보니 현실이었다. 아이들과 남편의 대화였는데 대강 정리해보니 이렇다. 밥이 조금밖에 없어서 셋이서 해결하려니 어찌할지를 모른다. 지금까지 밥하는 것을 식구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면 차라리 슈퍼에 가서 햇반을 사오던지, 라면을 사오던가 해야 하는데 누구도 요령을 피울 줄 모른다.  남편은 그저 아이들에게 대충 때우자고 만 유도한다.
"오늘은 명절이라 시켜먹을 수도 없어, 문 연 식당이 없거든!"
"어휴~ 저 인간들이 밥 한 끼도 해결을 못하네."

아내의 명절 후유증, 따듯한 말 한마디면_2
아내의 명절 후유증, 따듯한 말 한마디면_2

자면서 끙끙 앓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깨우지 않고 자기들끼리 저녁식사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만 낭패를 본 것이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어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가야지라는 의지가 앞섰지만, '안돼! 안돼! 참아야 해. 그래야 엄마가 아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 자네는 그냥 계속해서 누워있어야 해. 그래야 나의 소중함을 알게 되거든.....' 
누군가의 충고가 들려왔다. 물론 내안의 또 다른 나였을 테다. 난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새벽에 퍼뜩 눈이 떠졌다. 난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벌떡 일어나 감기몸살 약을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곤 어제의 힘듦을 툴툴 떨어냈다. 아줌마의 힘인 '깡'을 앞세우며 잡곡을 골고루 섞은 쌀을 씻어내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여냈다. 지난 밤 저녁상을 차려내지 못했으니 더욱 신경을 썼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 상을 준비하던 중 20세기 초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서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부르짖었던 신여성 나혜석이 떠올렸다. 그러면서 난 왜 그녀의 젊은 시절처럼 폼 나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애써 '에이~ 그래도 이런 생활이 가정의 미래와 평화를 위해서 낫지 않을까'며 나 자신을 토닥거렸다.

"여보, 어제 모자란 밥 실컷 드세요. 이것 불고기도 새로 만든 것이니 많이 드시고요."
"내가 언제 밥 모자란다고 했나?"
남편은 고봉밥을 뚝딱 해치우곤 사무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똑같이 구두를 닦아주고, 핸드폰을 챙겨주고, 현관문에 나가 엘리베이터 단추도 눌러주며 배웅했다.
아내에게 잘하는 법 어렵지 않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면 족하다. 가정에 몸이 부서지라 헌신하는 아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이 한마디뿐이라는 것을 남편과 아이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명절 후유증은 당분간 지속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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