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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르침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
여주 고달사지에서 천년의 세월을 읽다
2013-05-13 02:46:47최종 업데이트 : 2013-05-13 02:46:47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제법 여름 같은 봄날의 연속이다. 한낮의 온도가 영상 25도를 내달리면서 거리엔 가벼운 시폰 차림새의 여성들과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꽤 보인다. 패션을 주도하는 멋쟁이들의 특권이다. 
따뜻한 봄볕과 청명한 하늘은 마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이 인다. 그리하여 주말을 맞아 집을 나섰다. 다음 주 17일 석가탄신일을 앞둔 시점이니만큼 사찰탐방이 제격이라면서 수원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로 향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지(高達寺址)는 해발 400~500m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서북쪽 우두산(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광종 이후 최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폐사지'란 가람의 유형은 없고 그야말로 절터만 남은 사찰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고달사지를 단순한 지(址)로만 생각한다면 대단한 실례를 범하는 짓이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원종대사혜진탑, 고달사지석불대좌 등 품격 높은 유물들이 즐비하니 말이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장엄한 양감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조형예술의 극치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불교의 가르침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_1
가운데 나무가 촘촘히 박힌 작은 섬같은 곳이 '신털이 봉'이다

초목들과 옛 영화를 속삭이다

절터 입구 '신털이봉(峰)'의 유래에 화들짝 놀란다. 가람의 규모가 얼마나 컸으면 절 입구에 들어서면서 신발에 묻은 흙은 턴 양이 커다란 구릉을 이뤘을까. 눈을 감고 잠시 그곳에서 읍하곤 색색의 연등을 따라 서서히 경내로 들어선다. 

400여년의 세월을 굳건히 견뎌낸 느티나무 노거수가 '휙~휘익~' 바람소리를 내며 속인(俗人)을 잡는다. 가람의 문턱을 넘기 전에 '성냄도 탐욕도 번뇌도 모두 벗어던져라'며 일갈한다. 사람들을 수미산으로 이끄는 그 흔한 '일주문' 하나 없지만 옛 영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광활한 대지에 이내 고개가 숙여진다. 사방 30리가 절터였고, 머물던 스님만도 수 백 명이었다니... 당대의 위세가 남아있음인지 인적 없는 폐사지의 쓸쓸함은 어디에도 없다.

너른 터는 문화재 유구 조사에 따라 일정한 경계가 구획되어지고, 오직 사찰의 위용을 나타내는 유물만이 꼼짝없이 서있다. 

봄볕에 초목은 푸르디푸르다. 색들의 선명함에 눈은 맑아지고 땅속에서 뿜어내는 태동소리에 벌름벌름 가슴이 뛴다. 가타부타 절의 연혁을 따질 필요도 없다. 무명(無明)을 밝힐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곳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천년의 신심으로 자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옛 절터에 남은 위대한 유물이 그 증거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의 9파,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의 중심 사찰로서 원종국사(869~958)가 머물면서 절을 부흥시켰다.
그 유래에 걸맞게 상당히 넓은 토지를 지녔지만 가람은 모두 온데간데없다. 오직 들꽃과 잡초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주춧돌들과 위대한 석조물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어 뿐이다. 그럼에도 홀로 남은 유물들의 자태는 가히 명작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듯 보이는 나무 데크 길이 동선을 따라 탐방객을 유도하지만 무시하고 들어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대좌(보물 제8호)라는데, 계단부터 남다르다. 통 돌을 ㄴ자로 꺾고 홈을 파고, 단출하지만 위엄이 서려있다. 불상은 사라지고 부처님 방석 연꽃대좌만 남았지만 생김새가 든든하고 앙부 등 연꽃의 돌을 새김이 매우 탄력적이다. 

불교의 가르침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_3
혜진탑비 귀부와 이수의 앞과 뒤면, 그리고 이수 가운데 새겨진 비문

조금 더 들어가면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받침인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와 만난다. 고달사가 A급 사찰이었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순간이다. 거북등과 용의 얼굴이며 새겨진 조각 모양이 힘차다 못해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날 기세다. 비록 석비(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는 없어 완전한 몸이라 할 수 없지만, 귀부의 부릅뜬 눈이나 날카로운 발톱, 이수(비문석 위에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지붕)의 용트림 등이 매우 극적이라 탄성이 터져 나온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원종대사부도(보물 제7호). 원형이 잘 보존된 전형적인 고려 초 부도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면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 '고달사지부도'를 만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시작된 정형적인 8각원당형 양식이다. 기단부 위에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인 옥개석을 온전히 갖춘 부도(3.4m)로서 그 크기 또한 대단하다. 
연꽃 문양, 거북의 머리, 비천상과 함께 욱일승천하는 용의 모습에서 김동리 단편소설 '황토기'에 등장하는 쌍용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용의 발톱으로 여의주를 움켜쥔 모습은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신비감이 줄줄 흐른다. 두 탑(보물과 국보)을 꼼꼼히 비교해 보는 맛은 꼭 일품 요리 시식처럼 즐거움을 선사한다. 

불교의 가르침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_2
좌측이 원종대사혜진탑이고 우측이 국보인 고달사지 부도다
,
세월에 혹하지 않으리라

혜목산을 병풍 삼아 오롯이 자리했던 고달사, 지금이야 사찰의 문고리 하나 잡아보지 못하는 신세지만 너른 임야 초목들은 당대의 세월을 묵묵히 품은 채 천년세월, 혹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외친다.

호법 신장으로 늘 그곳을 지킨 유물들은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과 함께 사람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현재 고달사지 뒤편으론 간이역처럼 가건물로 지은 고달사가 객들을 맞이한다. 
"보살님! 점심시간입니다. 공양하시고 가세요."
극락전 본당에서 다향루 정자로 발길을 돌릴 즈음 공양보살로 보이는 분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린다. 절간의 인심이다.

차를 마시며 마음을 비우는 곳 다향루 마루에서 반가부좌를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극락전 앞마당 햇볕 바른 곳에 '해탈이'라 불리는 강아지와 스님만이 무상무념의 자세로 한참이나 앉아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 속을 통과하는 풍경소리에 잠시 눈을 감는다. 처처가 모두 이상향이겠지만 흐르는 냇물 위에 지어진 다향루야말로 속인들에겐 최상의 파라다이스란 생각을 할 즈음, 마음 한구석으로 파고드는 죽비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다. 

불교의 가르침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_4
현재 가건물로 세워진 고달사에는 푸근한 인심이 더해져 자연을 더 돋보이게 한다

다시 속세로 돌아가라는 소리일 게다. 

고달사지를 벗어나면서 선불교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선종초조 달마대사와 혜가의 인연을 담은 '설중단비(雪中斷臂)' 고사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세상에 혹하지 않으려면 고통을 응시한 혜가의 용기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놓아버린 순간 바로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곳, 고달사지에서 배운다.

* '설중단비(雪中斷臂)' 고사: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생겼지만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선종(禪宗)의 형태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초조 달마대사와 이조 혜가의 스승과 제자이야기다. 때는 12월9일 바람과 눈이 휘몰아치던 날, 소림사의 달마대사를 찾아간 혜가는 눈이 무릎까지 쌓이지만 밤을 지새우면서 가르침을 청한다. 이에 진정성을 느낀 달마대사가 뭘 알고 싶어 하는 것인지 묻자, 불교의 최고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청한다. 그러자 달마는 그런 것을 없다면서 수행만을 강조하자 혜가는 그 자리에서 왼쪽 팔뚝을 잘라냄으로서 하얀 눈밭은 일순간 붉은 핏물로 물들었다. 마침내 스승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 정도의 의지라면 깨달음에 이르려는 노력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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