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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작지만 충실한 공간
2013-05-08 07:57:59최종 업데이트 : 2013-05-08 07:57:59 작성자 : 시민기자   김소라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이하 생략)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읖조릴 수 있는 시다. 하지만 윤동주의 삶과 시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 부암동에 윤동주 문학관은 작은 규모의 공간이지만 시인 윤동주의 짧은 인생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윤동주 문학관, 작지만 충실한 공간 _1
윤동주 문학관, 서울 부암동에 위치. 수도가압장 시설을 리모델링했다

부암동에 윤동주 문학관이 작년 문을 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물론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지만, 문학관을 이곳에 지은 이유가 있다. 
당시 연희전문대를 다니고 있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을 했다고 한다. 바로 인왕산 인근의 하숙이었다. 하숙했던 기간은 4개월로 짧았지만 윤동주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시기라고 한다. 이곳에서 '별헤는 밤'과 '자화상' 등을 썼다. 

전시실은 작지만 3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제1전시실은 '시인의 집'으로 불린다. 
윤동주가 소장했던 책의 표지 복사본과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육필원고는 10대부터 시대순부터 전시되어 있다. 북한 사투리로 썼던 처음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길림에 있을 때 명동중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였는데 신사참배 강요로 전교생이 거부했던 일도 있다. 유순한 성품이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시인은 평생 정지용 시인을 사모했다고 한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정지용 시인을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죽은 이후 초판으로 나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남겼다. 

연희전문에 있을 때 3본의 필사본 시집을 만들어서 당시 이향아 교수에게 보였다. 그랬더니 '지금은 일제가 말과 글을 금지하면서 가장 좋지 않은 시기이니 지금은 시집을 내지 말라'고 하여 1년간 절필을 선언한다. 

윤동주 문학관, 작지만 충실한 공간 _4
윤동주가 살아생전에 직접 구매하여 읽던 시집들
 
이후 졸업을 앞에 두고 힘을 키우기 위한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도안증이 필요한데 한국이름으로는 증을 발급받지 못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히라누마라고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나온 시가 바로 '참회록'이다. 지식인의 고뇌와 고민을 담은 시이다. 

또 일본에 가서는 결국 정지용 시인이 나온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을 들어가게 되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옥사를 당한다. 고종사촌 송몽규가 당시 함께 유학길에 올랐는데, 같이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송몽규는 둘이 매일 매일 이름모를 주사를 맞았다고 고백했다. 약물 생체 실험으로 희생되었을 것 같다는 추측이 있다. 

1전시실에서 시인의 유품 몇 점을 보고 난 후 문을 열고 나가면 2전시실로 들어선다. 2전시실은 열린 공간이라고 불린다. 사실 윤동주 문학관이 '수도 가압장'이었던 시설물이다. 지대가 높은 산동네에 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압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시설물이라서 수도가압장을 폐쇄하려고 했는데, 이를 윤동주 문학관으로 리모델링을 하게 된다. 

건축가는 가장 원형 그대로 있는 가압장의 모습을 통해 윤동주의 삶과 문학세계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제2전시실은 원래 물이 가득 찬 공간이었다. 문학관에서 가장 보석같은 곳이라고 한다. 물탱크로 가득 물이찬 공간의 물을 비우고, 하늘을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우물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열린공간을 잠시 걸으면서 윤동주의 시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그리고 들어서는 공간은 제3전시실은 닫힌 공간이다. 닫힌공간은 '감옥'을 연상케 한다. 어두컴컴한 공간안으로 들어서고 문을 닫으면 영상이 흘러나온다. 윤동주의 일생을 10분의 영상으로 만들어 놓아서 관람할 수 있다. 감옥에서 죽어갔던 윤동주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휘리릭 둘러보면 5분도 안되는 시간에 관람이 끝나지만, 해설을 듣고 영상을 보고 하나하나 들여다 보아야 할 공간이다. 수도 가압장 시설을 윤동주 문학관으로 만든 히스토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건축물도 버리고 새로 짓고, 멋진 시설물로 만드는 것이 제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있는 것, 오래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진짜 건축정신임을 알게 된다. 

윤동주 문학관을 나오면 이어지는 '시인의 언덕'길을 오를 수 있다. 계단을 오르면 작은 공원이 나온다. 윤동주의 시를 자연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북악산, 그리고 부암동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하늘 위의 공간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거닐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문학관에서 윤동주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시인의 언덕'에서는 시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윤동주 문학관, 작지만 충실한 공간 _2
시인의 언덕에서
  
서울 부암동은 이제 문화의 거리, 역사의 거리, 스토리가 있는 공간으로 떠올르고 있다. 
괜찮은 카페, 미술관, 서울성곽 등이 이어지는 길은 걷기에도 좋은 곳이다. 윤동주 문학관이라고 하여 거창하고 멋들어진 공간이 아니어서 어쩌면 일부러 찾아간 사람들은 실망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문학관이라고 하여 꼭 수십, 수백억을 투자하여 거창하게 지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대장장이인 시인에게는 연필과 원고지만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인의 정신에도 문학관이 꼭 규모가 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수원에도 수원출신 혹은 수원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중 작은 규모로나마 문학관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지 발굴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윤동주 문학관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윤동주 문학관, 작지만 충실한 공간 _3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유고작 초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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