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억수로 많은 시금치를 어찌할꼬?
남해 시댁에서 주신 시금치를 다듬다가
2013-05-06 11:59:00최종 업데이트 : 2013-05-06 11:59:00 작성자 : 시민기자   신연정

시어머니, 시누이, 시댁에 '시'자만 들어가도 싫다는 며느리들 주변에 여럿 본다. 그래서 더불어 시금치도 별로라고들 한다. 봄 소풍 철이라 김밥 쌀 때 시금치를 넣게 마련인데, 꼬맹이 녀석에게도 요 시금치는 찬밥 신세다. 시금치만 쏙 빼고 먹는다. 

문제는 시댁에서 주신 엄청난 양의 시금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해에서 홀로 농사를 짓는 시 외삼촌이 계신데, 제사 때 마다 인사차 그 댁에 가게 되면, 엄청난 양의 시금치를 주시곤 한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주머니만큼 크고 볼록한 비닐에 한 가득 든 시금치, 그 초록빛 모양새가 영 탐탁지 않다.
"엄청 많네요. 조금만 주셔도 되는데..."
망설이다 슬쩍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시골에 줄 끼 뭐가 있노, 모양은 별로라도 억수로 맛 날끼다"

엉기고 성킨 시금치에서 흙은 철철 떨어지고, 게다가 냉장창고에 넣어둔 거라 오래 보관도 못한다고 한다. 얼른 다듬어 데치고 냉동을 시키라는 분부까지 내리신다. 
'헉~저리 많은 시금치를 비좁아 터진 아파트 어디에서 다듬고 또 데쳐 삶으라는 건지...'
그냥 두고 드세요 하고 싶지만, 뭐라도 주고 싶은 어른 앞에 말을 삼키고야 만다. 

매일 시금치 찬을 올려도 1년은 족히 먹겠다 싶은 시금치 자루를 결국 차 트렁크에 실었다. 멍한 표정으로 감사하다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길, 문제의 시금치 자루는 이틀 째 현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어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출근 하는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저거 빨리 처리해야 될 건데...그냥 두면 다 상할걸"

심란하다.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거절하고 안 받아 왔으면 속 편할 텐데, 입 속에 난 상처처럼 시금치 자루가 거슬린다. 오늘을 넘기면 아마도 자루 채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남해에서 수원까지 음식물 쓰레기를 배달한 셈이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거니와 나 자신, 시 외삼촌의 정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 무정한 며느리가 되게 생겼다.
비닐 자루를 슬쩍 벗겨 보니 약간 시들하긴 해도 아직 쓸 만해 보인다. 무작정 시금치 자루를 들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아파트 입구로 갔다.

억수로 많은 시금치를 어찌할꼬?_1
억수로 많은 시금치를 어찌할꼬?_1

"어머 그게 다 뭐에요?"
"시댁에서 시금치를 너무 많이 주셔서..필요하면 가져가세요"
"어휴 애들이 시금치를 잘 안 먹어서..."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주리라. 내 불편한 심경과 상관없이 시금치의 가치를 알아줄 누군가는 있으리라. 아들 녀석과 함께 오일장 나물 행상이 된 나는 누가 보거나 말거나 닥치는 대로 시금치를 다듬었다. 저 멀리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오시기에 반갑게 맞았다. 

억수로 많은 시금치를 어찌할꼬?_2
억수로 많은 시금치를 어찌할꼬?_2

"시금치 좀 가져가세요."
"왜 이리 누렇게 떳누? 그걸 언제 다 다듬어..."
"맛있는 거예요...그냥 가져가세요"
비닐봉지에 냉큼 담아 건넸더니 다 다듬어 놓은 걸 가져가서 어쩌나... 걱정을 해 주신다.

이렇게 얼굴만 아는 건너 동 새댁과 아름아름 아는 서너 분에게 문제의 시금치를 전할 수 있었다.  
사실 시작은 정말 그냥 어떻게든 시금치 자루를 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아파트 이웃에게 우리 집 시금치를 전하려다 보니 남해에서 온 정말 귀한 시금치다. 우리 시 외삼촌이 정이 많으시다. 침 발라가며 이런 너스레를 떠는 나를 발견했다. 

오늘 집집마다 오를 초록색 시금치 반찬을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도 들었다. 끝내 시금치를 다듬지 않고 누구에게도 이 맛을 전해주지 않고 그냥 버텼더라면 마음의 가책이 얼마나 컸을까?시금치 자루도 싹 비우고, 마음의 짐도 싹 덜고... 나만의 시금치 파티, 참 즐거웠다.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