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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
3일, 팔달문 해체 보수 2년 10개월 만에 모습 드러내
2013-05-04 11:00:23최종 업데이트 : 2013-05-04 11:00:23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3일, 수원화성의 자존심 팔달문이 다시 열렸다. 
지난 2010년 6월 구조적 안전성과 원형유지 및 문화재보존을 위한 해체 보수공사가 시작된 후 지난 4월 안전을 위해 둘러 처졌던 철골 가설 덧집이 벗겨지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2년 10개월 만에 웅자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1
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1

오후2시, 팔달문 중건· 준공식이 조선시대 국가의례 영제(禜祭)를 시작으로 팔달문 옹성 안에서 열렸다. 이에 앞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팔달산 중턱에 있는 '성신사'(화성의 성을 모신 사당)를 찾아 팔달문의 새 모습을 알리는 제를 지냈다. 
앞으로 성신사에서는 수원시의 모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고유(告由)를 하게 된다.
고유 후에는 바로 팔달문으로 돌아와 영제를 지내고 준공식의 행사를 이어갔다. 

준공식은 115만시민을 대표하는 염태영 수원시장과 남경필 국회의원, 노영관 수원시의회의장, 민한기 부의장, , 경기도의회 의원들, 수원시의회 의원들, 그리고 시민들이 옹성 내 가득 찬 가운데 약 1시간30여 분 간 진행됐다. 이후, 이들은 팔달문 해체보수 준공식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의 관람을 위해 수원화성박물관으로 향했다.

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2
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2

팔달문은 남대문과 함께 늘 우리 곁에 있었다

1395년(태조4)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7년)에 완성된 문 '숭례문'은 서울인 한양의 4대문 가운데 하나다. 
한양도성에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성문 중 하나였던 숭례문은 도성의 남쪽에 있는 큰문이라 하여 '남대문'이라 불렀다. 대한민국 국보1호로서 왜란과 호란의 아픔은 물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포화도 비껴가며 600여년 우리역사의 자존감을 지켜온 문화재였다.

그런데,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그 문화유산이 2008년 2월 새벽, 석축을 제외하고 화마에 의해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1일 숭례문 복구 고유제가 종묘 정전에서 열린 후, 4일 복구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정확히 5년 2개월이 흐른 후 국민들 앞에 다시 섰다. 다행이 2005년 실측한 도면이 있었기에 원형을 찾을 수 있었다. 

팔달문은 수원화성 축성이 시작된 1794년 2월, 북문의 장안문과 함께 터 닦기 공사가 시작된 후 이듬해 9월, 각각 완성된 조선후기의 중심 문이다. 
이후, 수원의 남문인 팔달문 역시 서울도성 숭례문처럼 수려함과 화려함, 더불어 군사적 기능까지 겸비한 건축물로서 그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전쟁 등 끝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1964년 국가의 보물 402호로 지정됐다. 늘 우리 곁에 온전히 남아준 소중한 문화재 팔달문은 '화성성역의궤'와 실측 자료에 의거해 전면해체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팔달문은 왜 우리에게 소중한가?

1795년에 세워진 후 약 220여년을 수원화성의 남쪽을 지켜온 팔달문(八達門)은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다'고 한 것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물자가 모이는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
즉, 팔달문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길목 장안문과 함께 도시를 관통하는 도로로서 이 문을 통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는 길과 강릉으로 가는 길 등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교통이 편리한 곳에는 상업이 발달해 자연스레 지역의 부(富)를 일으키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 현재 팔달문 안팎 시장이 그 맥과 상통하니 팔달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수원시민들의 혼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정조대왕 꿈에 의한 거점도시로서 조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즉 정조의 개혁의지에 의해 축성된 화성에는 가장 중요한 이념인 '위민(爲民)' 정신이 오롯이 배어있다. 즉, 최고의 성곽을 축조한다는 사명으로 실명제를 도입하고, 축성기일을 단축하는 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부역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더운 날엔 척서단을 내려주고, 추운 날엔 털모자를 하사하는 등 진심으로 백성을 아낀 정조의 애민정신이 있기에 수원화성은 더욱 빛난다. 

팔달문 중건 역사, 여기서 보자

팔달문 해체보수 준공식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곁에'가 3일부터 7월 21일까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번 특별전시는 성곽 문루를 주제로 팔달문의 해체보수 공사과정과 팔달문 건축형태 및 특징 등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전시회 주제는 '기록화와 고지도에 나타난 성문', '성문건축의 백미, 팔달문', '사통팔달, 변화의 문', '다시 돌아온 팔달문'으로 구성됐다. 현재 팔달문 성문에 걸린 사이즈 그대로 탁본된 편액 '八達門'이 관람객을 반긴다.

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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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4
다시 열린 팔달문, 역사의 현장에 서다_4

조선전기의 학자 양성지(1415~1482)는 '조선은 성곽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조선시대는 산성과 읍성이 무척 많았다는 예기다. 수많은 기록화와 지도를 통해 산천형세와 도로, 건축물, 장시 등 시대별 당시 성곽의 형태 및 시설물을 살피면서 산성의 암문 등 조선후기에 제작된 수원화성부 지도와 견줘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통 문화재 복원 시 구(舊)부재 재활용을 원칙으로 하는바, 이번 팔달문 해체보수공사엔 약 23% 신부재가 사용되었는데, 이번 전시에 60여점이 공개됐다. 역사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특히 우학문화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성능행도병'이 처음으로 공개됐는데, 이 유물에서도 팔달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능행도와는 약간 차이가 난다는데, 사가에서 모사한 작품으로 보인다고. 일반인들이 차이를 알기엔 다소 어렵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문화재, 국민모두 관심과 애착을 가져야

수원화성 축성의 주역들인 번암 채제공과 화성유수 조심태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팔달문 중건 준공식'은 우리의 자부심과 함께 문화유산 보호관리라는 책임을 느끼게 했다. 
우리의 무관심으로 문화재가 방치되고 더 나아가 존망의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이 수없이 많다. 문화재는 한번 훼손되면 복구가 힘들다. 그렇기에 더욱 애착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이제 수원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원화성의 팔달문이 단장된 모습으로 탄생됐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문화융성'에 걸맞게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소중히 지켜나가자. 그간 중건에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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