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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의 역사와 종교가 만나는 ‘당성’
중국과의 교역 때문에 서로 차지하려던 곳
2013-04-26 11:19:16최종 업데이트 : 2013-04-26 11:19:16 작성자 : 시민기자   하주성
1500년의 역사와 종교가 만나는 '당성'_1
복원을 한 당성의 성벽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4월 24일, 당성으로 올랐다. 당성은 옛 명칭으로 '당항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름 그대로 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곳이다. 4월인데도 날이 덥다.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 직후에 나선 답사 길에 비탈을 오르려니, 몸이 가볍지가 않기 때문이다.

1500년의 역사와 종교가 만나는 '당성'_2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옛 성의 흔적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천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1500년의 역사와 종교가 만나는 '당성'_3
망해루라는 누정이 서 있던 터
 
망해루터와 건물지, 우물터 등이 남아있어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루는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밑으로 내려오니, 우물터가 보인다. 이 우물터는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한다.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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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의 식수원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터
 
당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성 아래에 도착했다. 당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땅을 파서 마련한 움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움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움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에 가지 않겠다.'라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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