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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
부안 기행(1편)
2013-04-23 13:30:57최종 업데이트 : 2013-04-23 13:30:57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1
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1

밤부터 내린 비는 동이 튼 새벽이 찾아왔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말을 맞아 수원화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실학자 '반계 유형원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부안탐방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실학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인만큼 내리는 봄비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니 한 치의 망설임도 일지 않는다. 배낭에 먹을거리와 카메라를 후다닥 챙겼다. 일행들과의 약속장소로 나선 시각 아침 6시20분,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매우 한적했다. 

실학의 산실, 부안 반계마을

지난해 10월 문인들의 뒤를 쫒아 부안탐방에 나선 후 이번이 두 번째다. 그렇지만 목적이 다른 만큼 탐방지도 약간 차이가 있다. 지난번은 신석정문학관 등 문학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번 탐방은 역사와 문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도 우리 수원과는 떼려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실학의 비조'를 찾아가는 길이다.

(사)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봄 정기답사로서 정조와 수원화성 전문가로 유명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김준혁 선생님이 안내를 맡았다.

내소사에서 곰소염전 쪽으로 가다보면 반계선생유적지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혹은 우반동이라고 불리는 변산반도 산자락이다.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 선생이 만년에 칩거하면서 글 쓰고 공부하고, 더불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반계서당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는 유허지다. 그의 호인 반계는 이 우반동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을 뜻하는데 현재의 서당은 70년대 초당에서 기와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2
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2

수원화성과 반계 유형원, 무슨 관계?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수원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우뚝 선 '수원화성!'. 우리는 흔히들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곽으로서 '성곽건축의 꽃'이라며 최대의 찬사를 던진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당시 새로운 학문이었던 '실학'에 바탕을 두고 대단히 과학적인 설계와 실용적인 건축기법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조정이 청나라에 굴복하고 쩔쩔맬 때 반계 선생은 벼슬의 뜻을 져버리고 조상의 세거(世居)지였던 우반동으로 낙향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적으로 북인계열 남인출신이었던 아버지 윤흠이 광해군 복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지만, 부친의 참화는 훗날 정치나 과거와는 멀어지게 된 이유였을 터이다. 

어쨌든 이곳 '반계서당'에서 31세 때부터 52세 세상을 뜰 때까지 모든 실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20여 년 동안 만권의 책을 읽으며 완성(26권13책)된 이 책은 70여년이 흐른 영조 대에 이르러 국정개혁의 지표가 되면서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반계 선생은 산천이 아름다운 부안 우반동에 기거하면서 성리학을 비롯해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병법· 문학 등을 섭렵하면서 틈틈이 전국유람에 나섰다. 백성들의 실생활을 통해 세상의 올바름을 얻기 위함이었다. 또한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고자 말을 타고 군사훈련에 임하는가하면 병기도 만들고, 더불어 지방방어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재야 사림학자로서 인생관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은 반계수록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라부강과 민생안전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토지제도가 다산 정약용의 여전제로 이어지고 과거제도의 폐지, 병법 등 여타의 주장들이 정조대와 맥을 함께한다. 즉, 사농일치, 군사훈련..... 6전 체제로 수록된 반계수록엔 이외도 부록편이라 할 수 있는 군현제도에 '수원화성'처럼 축성 이야기도 나온다. 

현실개혁 이론으로서 조정대신들의 필독서가 된 영조대를 거쳐 정조대에 간행과 보급이 확대되면서 결국 유형원의 축성이론이 다산에 의해 '수원화성' 축성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으로 그리고 다산 정약용으로 계보를 이으면서 활짝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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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4
실사구시의 비조, 반계선생을 만나다_4

실학의 비조 반계의 정신을 엿보다

반계서당 가는 길이다. 
입구 초입에 들어서자 '실사구시(實事求是)'라 쓰여 진 거대한 입석이 탐방객을 맞는다. 사실을 토대로 섬기(구하)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역사교과서에서 실학의 본질이라고 배우며 눈에 익힌 말이다.

입구를 벗어나니 흙길대신 시멘트와 너른 돌들을 섞어 바른 인공 길이다. '아이쿠~ 흙길이 더 좋은데....' 길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바꾼다고 했는데, 인적 없는 그곳은 마냥 쓸쓸함만이 퍼졌다. 그나마 주변은 봄의 설렘이라는 4월이라 두릅 등 초목이 연두 빛에서 초록으로 물들고 있어서 다소 위안으로 다가왔다. 

비는 여전히 하염없이 내렸다. 빗물에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조심스레 우산을 받치고 오르는 일행들, 10여분 오르막길을 올라갔을까, 바위 산 아래 일직선 낮은 돌담장과 서당 지붕의 자태가 얼핏 보인다. 문화재 답사 선수들인 일행들, 일제히 카메라 세례를 퍼붓는다. 드디어 목전, 조촐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계서당'이라 쓴 현판아래 너른 툇마루가 아늑하다. 돌담 너머로 우동리 마을이 한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왜 그곳에 서당이 들어섰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절로 깨치게 된다. 기품 있는 툇마루에 앉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수원화성에서 왔으니 실학의 선구이신 분께 예를 표하기 위함이다. 

"지금의 읍치도 좋기는 하나 북쪽 들은 산이 크게 굽고 땅이 태평하여 농경지가 깊고 넓으며 규모가 크고 멀어서 성을 읍치로 하게 되면 참으로 대번진(大藩鎭)이 될 수 있는 기상이다. 그 땅 내외에 가히 만호는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39p 인용. 김동욱 

다산 선생 이전 반계 유형원 선생이 반계수록에서 수원화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정조대왕 또한 이를 공감하고 팔달산 아래 신도시 '수원화성'을 건설했다. 철저한 현실인식의 사상 실학, 실학의 비조 반계선생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를 100여 년 전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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