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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쓰는 것
우크라이나 고려인을 만나다(5)
2010-07-12 05:40:03최종 업데이트 : 2010-07-12 05:40:03 작성자 : 시민기자   김형효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54세)는 그동안 수차례 소개한 바 있는 예빠토리야 고려인협회 회장이다. 오늘은 특별히 그녀의 가족이주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소개한 강정식 교수가 일제시대 이주자라면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의 가족은 그보다 한참 이전에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민족의 러시아 이주사는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이 넘는다. 최초의 이주는 1862~63년 사이 32가구를 시작으로 하였으며 그 후 1870년대부터는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다(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 기념 문집) 전해진다. 

오늘 소개하는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의 가족도 1900년대 초반에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녀가 전한 할아버지 김보연이 오래전부터 러시아 극동 하바로프스키 크라이에서 거주하다 실로 미하일로프크에서 살았다는 그녀의 증언 때문이다. 이미 그때 그녀의 할아버지는 장성한 아들인 김바실리콘스탄티노치 플로리다의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그가 러시아에서 출생했다는 점이 그를 반증하는 일이다. 플로리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실로 미하일로프크에서 살다 1937~38년 스탈린 정부에 의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의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하다 기차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쓰는 것_1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가 품은 부모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이 사진 속의 고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느낌이다.

그 당시의 말을 직접 당한 것은 아닌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아버지를 통해서 전해들은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3남 1녀 중 둘째였으며 그녀의 고모의 생사는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그때 성공적으로 이주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면 구소련지역 어디에 혹은 러시아에 살고 있을 것이라 말하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 당시의 이야기를 텔레비전 다큐에서 보던 것과 간접경험을 통한 증언을 듣는 기분은 참으로 달랐다. 텔레비전으로 보며 아픈 역사였다고 생각하던 감상이 여전히 아프기만 하구나 하는 현상을 목전에서 확인하는 심정으로 전해왔다. 지금도 수많은 고려인들이 그리 살아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더욱더 가슴시린 일이다. 

아무튼 할아버지와 가족 모두가 흩어졌다. 그녀의 아버지 김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1930~1986)는 당시 장성했던 우즈베키스탄 형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후 학교를 다니며 나예브도키예(1932~1983)를 만났다고 한다. 김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가 1930년 출생이면서도 러시아인의 이름에서 사용하는 부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적어도 1930년 플로리다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녀의 할아버지가 이주해왔다는 증거가 될만한 일이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오블례스찌 치나스키 지역에 소를 기르는 농장(블롐소브호스 오트질레니야1)에서 살다가 러시아 군에 입대했다. 그는 카프카스에서 장교로 근무했으며 제대 후 나예도키예와 정식 결혼을 했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쓰는 것_2
카프카스 농장에서 김바실리콘스탄티노비치 카프카스 농장에서 가운데 흰와이셔츠 입은 사람이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의 아버지 김바실리콘스탄티노비치

그는 결혼 후 카프카스에 정착해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를 포함해서 1남 3녀를 낳았다고 한다. 지금 그들은 모두 크림지역에서 살고 있다. 1960년에 처음 예빠토리야에 이주해온 고려인이라고 한다. 예빠토리야는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고 고려인이 200~300여명이 살고 있는 흑해연안의 주요관광도시이다. 마찬가지로 얼마전 소개한 김보바(52세)씨도 플로리다의 남동생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처음 예빠토리야에 오기전 어머니 나예도키예의 오빠가 소치 남서쪽 우크라이나 땅 아이조브해 연안에서 대농장을 경영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 필자는 생각한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직접 살아가며 쓰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 속에 과거사도 현재의 우리 모두가 함께 쓸 몫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소개하는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의 가족사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의 아버지는 그의 부친을 생매장한 것이나 다름없는 러시아 군대의 장교가 되어 근무를 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국가의 군인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녀의 아버지 세대가 겪어야했던 아픔을 지금은 없는 역사라 할 수 있을까? 지금 조국이 바라보아주지 않는다면 수많은 내 동포, 우리 동포들은 고아처럼 살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고아인줄 조차도 모르고 살아야하는 천형처럼 숙명처럼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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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의 학창시절 플로리다의 학창시절 사진이다. 뒷줄 두번째 오른편에서 다섯번째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다. 고려인은 그녀 혼자고 모두가 우크라이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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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레나의 학창시절 사진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의 딸, 레나의 학창시절 사진이다. 그녀도 어머니처럼 혼자다. 뒷줄 두번째 줄에 두번째가 플로리다의 딸 레나다. 그녀는 우크라이나인과 결혼했다.

고려인들을 만나며 필자는 내 조국이 국가차원으로 해야할 일을 안한다. 그동안 수차례 지적해온 동포들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등등의 통계조차 없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해외동포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할 필요성을 느끼는 필자의 요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사회에서의 한민족 성원 전체의 미래 생존을 위한 관점에서 고민되어야할 문제란 생각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해외동포의 문제는 비단 우크라이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일동포들의 문제도 그렇고 재중동포들의 문제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살기 어려운 시절에 북한이 재일동포들에 대해 보여주었던 관심을 따라 배워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적대시하고 있다고 해서 영원한 적인가? 아닌가? 가장 기초적인 것도 가리지 못하고 더 강한 압박으로 적대시할 일이 아니라 앞서 강정식 교수님의 뼈아픈 충고처럼 "고려인, 조선인, 북한인, 남한인 어떻게 불리는가에 상관 말고 뭉쳐서 살아야한다."는 대의적인 시각을 갖고 살아가면 안 될까? 강교수의 인식은 국가당국에서 가져야할 인식태도이고 우리 민족 성원 모두의 인식태도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

우크라이나 고려인 이주사, 예빠토리야 고려인 이주사,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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